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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6. 업과 인과

by 심신건강 2025. 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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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당시에 많은 사상가들이 출현하여 갖가지 주장을 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여섯 명의 외도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대개 운명론을 주장하거나 쾌락과

향락을 마음껏 누리며 살라고 가르쳤다.  부처님은 이런 주장을 비판하시고 이들의 가르침이 가져올

윤리적 폐해를 경계하셨다.

 

-- 허공도 아니요,  바다도 아니다.

깊은 산 바위틈에 들어가 숨어도,

일찍이 내가 지은 악업의 재앙은

이 세상 어디서도 피할 곳 없나니.

(법구경)

 

부처님이 말씀하신 인과의 법칙은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따른다는 것이다.   착한 일을 하면 즐거운 결과가

따른다는 것이다.    착한 일을 하면 즐거운 결과가 따르며, 악한 일을 하면 고통스러운 결과가 온다.   

이를 선인락과  악인고과  의 '인과응보'  라고 한다.

또한 그 결과를 낳는 근원적인 행동을 업이라 한다.  업은 산스크리트의 까르마에서 나온 말로 '의도를 가진 행동'

이라는 뜻이다.    부처님은 절대자의 섭리나 정해진 운명을 부정하고,  모든 것은 자신의 의지와 행동에 따라 

성립한다고 말씀하셨다.   즉  자신의 의지나 행동으로 자기 운명을 개척할 수 있으며,   삶의 결과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의 책임이라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가 전혀 개입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출신계급이나 삶의 조거조차도 사실은 모두 자신의 업에 따른

과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나쁜 짓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당장 그 죄값을 받지 않는다고 언짢아 할 필요가 없다.

언젠가는 반드시 그 악업의 과보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그 사람의 지금 모습을 보면

전생을 알 수 있고,  그  사람의 현재 행위를 보면 내생을 알 수 있다고 '삼세인과경'에서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고통스러운 과보를 낳는 악업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미혹이다.  번뇌에 물들어 진리에 어둡고

마음이 흐려져 악업을 짓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과보를 받는 것이다.  이것을  흑 - 업 - 고의 삼도라고 부른다.

 

반대로 진리와 깨달음을 지향하는 마음은 선업을 낳고, 그 결과 선한 과보를 받는다.

진리와 깨달음을 지향하는 마음을 보리심이라 한다

업이 헤어날 수 없는 굴레라고 잘못 생각하는 경우도 있지만, 오히려 자신의 주체적인 의지와 행동으로 삶을 

변화시켜 나가는 긍정적인 지향과 원리를 담고 있다.

 

수행의 길도 마찬가지다.   전생이나 과거에 길들여진 나쁜 습성과 잘못된 행동을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진정으로 참회하고 바르게 수행하면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몸과 말과 뜻으로 짓는 삼업의 과보는 매우 정확해서 한 치의 오차도 없다.  이것을 인과율이라고 한다.

악업을 많이 지을수록 그 삶은 구속받고 고통스러워진다.

반면 선업을 쌓을수록 삶은 자유로워지고,  깨달음을 향해 나아갈 때 장애가 없어진다.

즉, 자신을 구속하는 것도,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것도 모두 자기 자신이다.  악행을 멀리하고 선행을 닦으며,

또한 수행에 정진함으로써 중생의 마음을 벗어버리고 깨달음을 얻어댜 한다.

 

7.  공 과 마음

 

무아와 무상은 대승불교에 오게 되면 공으로 개념이 확대된다.

공이란 모든 것이 고정된 실체로서의 자성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허무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비유하면 허공과 같다.   허공은 줄거나 늘지 않으며 생기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바로 텅빈 공에

모든 것이 들어 있고 모든 것이 창조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 허공과 같은 마음이 바로 공이다.

우리가 법회 때 암송하는 -반야심경- 에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라는 말이 있다.  이 구절과 관련하여 공의 의미를

더 자세히 살펴보자.   근본불교시대를 지나 부파불교시대에는 나는 무아로서 공하지만, 그 나를 구성하는 

요소로서의 법은 실체로서 언제나 변함없이 존재한다고 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 접어들어 불교도들은 

반야의 초월적 지혜를 높이 내걸고 법도 역시 공하다고 천명한다.

이와 관련하여 역시 반야심경을 보면  조견오온개공  이라는 구절이 있다.  나를 구성하는 법으로서의 

다섯 가지 요소를 지혜의 눈으로 비추어 보니 모두 공이라는 것이다.  보고, 듣고, 맛보고, 만지고, 느끼고, 행동하고

생각하며 판단하는 모든 것이 공이라는 뜻이다.  왜 그런가?  어떤 요소이든지, 그것이 아무리 단단한 다이아몬드일지라도,

언젠가는 소멸하고 만다.  모든 물체들은 쪼개고 쪼개 보면 분자나 원자로 이루어져 있고, 그 원자 자체도 끊임없는

변화 속에 있으며 뭐라고 규정할 만한 것이 없다.

그러나 대승의 공은 이러한 사물의 모습을 물리적으로 쪼개어 공이라고 판단하기보다는 사물을 보자마자 그 자리에

그 모습이 비어 있음을 투시하는 길을 제시한다.  어떤 사건이나 물건, 어떤 사람의 모습을 보더라도 바로 

그 본래 모습이 공함을 그 자리에서 보는 것이다.

 

또 하나 대승불교의 공은 모든 지적인 분별을 타파하는 데 그 주안점이 있다.  모든 분별작용으로 인한 견해와

판단은 사물이나 사태의 본질을 바로 보지 못하므로, 그러한 이성적인 생각, 판단, 입장, 주장 등을 철저히

부수어 버린다.  공의 견지에서 보면 사람들이 저마다 옳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 사람의 편견이거나 앎의 조그마한

부분에 불과하다.   그런데 마치 사람들은 그것이 전부인 양 자기 주장을 내세우며 대립하고 편을 가르며 싸운다.

공은 그러한 억측과 편견을 철저히 부수어 버린다.  어느 입장에 서서 집착하는 그 마음을 모조리 타파해 버린다.

 

그래서 색, 즉 물질이란 것도 실체가 없으니 공이라 부정하고,   모든 판단과 분별작용도 공이라고 부정한다.

나아가 공마저도 부정하여 그  공에 집착하는 것도 철저히 부정한다.   공에 집착하거나 머무는 것을 

허무주의적 견해라고 비판하는 것이다.

그러면 아무것도 긍정하지 않는가?  그것이 아니다.  공마저 공으로 비워 다시 색을 긍정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견해를 베어버리는 절대 부정을 거쳐 절대 긍정에 도달한다.   이렇게 해서 다시 색은 공으로 살아난다.

그것은 공으로서의 부정을 통해서 살아난 묘유로서의 색이다.  이러한 묘유로서의 색은 도처에 있다. 

머무는 곳마다 진리가 살아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  즉  색은 공하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것도 없고 쓸모가 없는 무가 아니라,  형태를 갖춘 색으로 존재한다.  공은 색으로 

살아 있는 것이다.   우리가 밥 먹고 세수하고 일하는 그 색의 움직임 속에 공은 살아 있는 것이다.

그것이 묘유의 움직임이다.    그러므로 이슬이나 물거품처럼 금방 사라지고 말 색에 집착해서는 안되며,

모든 것이 사라진 허무에도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즉 색과 공, 둘다에 집착하지 않는 걸림없는 자세로서,

묘유의 움직임을 보고 감사하면서 살아야 한다.   색에서 공을 보고,  공에서 색을 보는 '색즉시공 공즉시색'

에는 이러한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불교는 마음의 종교라고 한다.   모든 것은 마음이 만들었다고 해서 일체유심조 라 한다.

그 마음이 바로 공의 마음이다.  그 공한 마음에서 모든 것이 창조된다.  유일신이 창조주가 아니라, 

마음이 창조주요 주인공인 것이다.   우리의 마음에서 그리면 그리는 대로 보이고,  생각하면 생각하는 대로

반드시 이루어진다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말이 있다.

마음을 가다듬고  간절히 노력하면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내 마음이 닫혀 있으면 어떤 사물도 보이지 않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이것이 중요하다.    마음이 감응하고 느낄 때 주변의 모든것이 살아 움직인다.

더욱이 그 마음이 깨어 있을 때 제대로 보이며 널리 이루어진다. 그래서 공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공으로 자기를 비우고 하심하면서 자기를 허공처럼 열어보라.  그렇게 자기를 비우면 그 빈 마음에 모든 것이 들어온다.

자기를 비우고 자비와 사랑,  나눔과 베품을 실천하면 실천하는 만큼 나는 넓어지고 전 우주와 하나가 된다.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육바라밀의 실천은 이러한 마음을 바탕에 두고 나를 한없이 열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부처님의 마음이요, 보살의 마음이며, 진정한 불자의 마음이다. 

 

8. 계율 - 불자의 생활 규범

 

계는 산스크리트 실라에서, 율은 비나야에서 어원을 찾을 수 있다.   계와율은 불교도의 생활 윤리, 또는 

삶과 수행의 규범이다.   계율은 일반적으로 승가를 구성하는 사부대중이 준수해야 하는 삶의 방식과

규율로서 함께 통칭된다.

그러나 계와 유른 엄밀하게 말하면 그 뜻이 다르다.  계는 불교 수행을 하는 사람이 자발적으로 지켜야 하는

도덕적 수행이며, 율은 승가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한 타율적인 행위 규범이다.

따라서 계는 주체적이며 자율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고,  율은 타율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율의 조항을 위반했을 때에는 규제나 벌칙이 가해지지만, 계에는 그 같은 벌칙이 없는 것이 원칙이다.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중도는 어디까지나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이 법에 근거를 둔 생활방식을 자각하고,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행위였다.  그러한 생활 방식을 계라고 한다.

그러나 교단이 커지고 수행자가 늘어나면서 수행자 개개인의 자각만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 가운데는 출가자로서 훈련이 덜 된 사람이나 전혀 자각이 없는 사람도 있었다.  따라서 수행자로서

허용될 수 없는 행위가 등장하게 되었고,  그런 옳지 않은 행위가 있을 때마다 부처님은 그것을 규제하는

금지조항을 만드셨다.   이것을 수범수제라고 한다. 

그러므로 불교의 율은 일정한 어느 때에 부처님께서 여러 가지 상황을 예측하고 일시에 율장으로 제정한 것이

아니라 필요에 따라서 그때 그때 제정한 것을 모아놓은 것이다.   이렇게 수행자로서 개인적으로나 교단의

구성원으로서 지켜야 할 행위 규범을 율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율은 경전 결집 과정에서 계속 전승되어 왔고,

출가자와 재가자의 규범으로서 계속 지켜지고 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정기적인 점검이 자자와 포살이다.

 

-- 믿음 있으면 계  절로 이뤄지고

계를 따르면 이름이 높아진다.

이름을 좇아 어진 벗 많으리니

가는 곳 어디서나 공양 받는다.    ---법구경 ----

 

재가불자가 수지해야 하는 오계, 십선계, 보살계  등은 모두 이와 같은 계의 정신을 따르고 있다.

이는 스스로 선택한 것이며 자율적인 것이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고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계율의 각 조항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 

자구 해석에 지나치게 얽매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최소한 오계를 지키는 것은 불자의 도리라고 할 수 있다.

 

오계

첫째.   산 목숨을 죽이지 마라.

둘째.   주지 않는 것을 갖지 말라.

셋째.   삿된 음행을 하지 말라

넷째.   거짓말을 하지 말라.

다섯째. 술이나 마약처럼 중독성이 있는 것을 먹지 말라.

 

오계는 모든 악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다섯 가지 악을 범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계의 목적은 악을 범하지 않고 선을 실천함으로써, 서로 존중하고 아끼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하지말라'는 것은 금지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실천을

전제로 한다.  이를 테면 '산 목숨을 죽이지 말라' 의 경우,  모든 생명은 본래 불성을 지닌 고귀한 존재이므로

죽이지 말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다.

오계의 목적은 악을 범하지 않고 선을 실천함으로서, 서로 존중하고 아끼며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청정한 계를 지킴으로써 지혜와 선정의 온갖 좋은 공덕을 얻을 수 있다.

 

 

불자는 오계의 가르침을 실천해야 한다.   그러나 계율을 자기 스스로 그것에 얽매이게 된다면, 계의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다.  계의 수행자의 심신이 더 이상 오욕 등에 물들지 않도록 보호해주고,  번뇌에 휘둘리지 않고

두려움없는 평온한 상태로 이끌어주는 동반자여야 한다. 

그러나 살생을 금하는것이 가장 큰 계율임에도 불구하고 더 큰 살생을 막기 위해 그것을 열어야 할 때와

닫아야 할 때가 있다. 이것을 지범개자 또는 개차법이라고 한다.  지는 계율을 지킨다는 뜻이고 범은 

못 지킨다는 뜻인데,  지킬 수 없는 부득이한 상황에서 이를 허용하는 것을 개 라고 한다.  

예를 들어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계를 어기고 사냥꾼에서 사슴을 구해준 나무꾼의 경우가 그렇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지면 원칙대로 다시 막아야 하는데, 그것을 차라 한다.  계율을 지키는 것이 더 많은

사람들의 행복에 제약이 되거나, 또는 그 계를 지키기 위해 더 큰 계를 어겨야 하는 경우,

그 상황을 타개할 때까지 열고 상황이 달라지면 다시 닫을 수 있어야 한다.

 

계율은 또한 자기 스스로 그것에 얽매이게 된다면, 계의 정신에 어긋나는 것이다.

계는 수행자의 심신이 더 이상 오욕 등에 물들지 않도록 보호해주고, 번뇌에 휘둘리지 않고 두려움 없는 

평온한 상태로 이끌어주는 동반자여야 한다.  계를 지키는 것은 성실하고 참된 삶을 살고자 하는 의지이며

발원이므로, 자유롭고 자연스러워야 한다. 이것이 중도에 입각하여 계를 지키는 것이다.

 

계는 복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의 규범을 세우기 위해 지키는 것이다.

계율은 불교도의 생활 윤리 또는 삶과 수행의 규범이다.  계를 수지한 뒤에는 계율을 삶의 좌표이자,  가치관으로

삼아 자신의 삶을 참되게 하는 길잡이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불자들은 이러한 계를 지키기 위해서 항상 노력하고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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