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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노자 - 노자도덕경에 대하여

by 심신건강 2025. 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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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도가철학의 시조인 노자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책으로,  노자 또는 노자도덕경이라고 한다.

약 5000자  81장으로 되어 있으며, 상편 37장의 내용을 도경,  하편 44장의 내용을 덕경 이라고 한다.

 

노자가 지었다고 하나 한 사람이 쓴 것이라고는 볼 수 없고, 여러 차례에 걸쳐 편집된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여러 차례에 걸쳐 편집된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오랜기간 동안 많은 변형 과정을 거쳐

기원전 4세기경  지금과 같은 형태로 고정되었다고 여겨진다.

여러 가지 판본이 전해 오고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는 한나라의 문제때 하상공이 주석한 것으로 알려진

하상공본과 위나라 왕필이 주석하였다는 왕필본의 두 가지가 있다.

그리고 전문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지만,  둔황에서 발견된 당사본과 육조인사본이 있고,

여러 곳에 도덕경비가 아직도 흩어져 있어 노자의 경문을 살펴보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원래 도덕경은 상'하로만 나누어졌을 뿐이지만, 장구지학이 성행한 하대에 들어와서 장과 절로 나누어졌다고 보인다.

도덕경의 구성 체재에 대해서는 오래 전부터 학자들의 의견이 분분하였고, 성립 연대 및 실질 저자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았는데,  한 사람이 한꺼번에 저술하였다는 관점과 도가학파의 손에 의하여 오랜 기간에 걸쳐

당시의 여러 사상을 융합시켜 만들어진 것이라는 관점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한 사람의 전작물임을 주장하는  관점은 노자를 공자와 같은 시대의 실존 인물로 보아 도덕경을 그의 작품으로

인정하는 것이고, 부정하는 관점은 노자가 가공인물이라는 점과, 또한 비록 실존인물이라 하여도 

도덕경 을 그의 작품으로 인정하는 것이고,  부정하는 관점은 노자가 가공인물이라는 점과,  또한 비록 

실존인물이라 하여도 도덕경 과는 상관이 없다는 관점에서,  현존하는 도덕경 은 여러 사람에 의하여

오랜 기간 동안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도덕경 을 둘러싸고 제기되는 많은 문제점과 상반된 처지에도 불구하고,  도덕경 의  내용을 이루고

있는 기 본 사상이 변함없이 계속해서 일관성을 유지해 오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

도덕경의 사상은 한마디로 무위자연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무위는 '도는 언제나 무위이지만 하지 않는 일이 없다'의 무위이고,  자연은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을

본받는다' 의 자연을 의미하는 것으로,  결국 도덕경의 사상은 모든 거짓됨과 인위적이 것에서 벗어나려는 

사상이다.

좋거나 나쁘다,  커거나 작다.   높거나 낮다 등의 판단들은 인간들이 인위적으로 비교하여 만들어낸 상대적

개념이며, 이런 개념들로는 도를 밝혀낼 수 없다는 것이다.  언어라는 것은 상대적 개념들의 집합체이므로

도덕경에서는 언어에 대한 부정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이 점에서 유가사상과 현격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유가사상에서는 인위적 설정이 강조되는 예학이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으며,  언어에 의한

규정이 강력하게 요청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도덕경 에서는 규정서의 파기와 언어에 대한 부정을 강조하는데,   유가사상이 중국 북방의 황화 유역에서

형성된 것인 반면,  이런 무위자연의 사상은 중국 남방의 양자강 유역에서 형성되었다는 기질적인 차이로

설명되기도 한다.   즉 북방은 생존조건이 열악하기 때문에 살아가기 위해서는 현실적이고 투쟁적이어야 하지만,

남방은 날씨가 온화하고 자연 조건이 순조러워 평화적이고 낭만적이라.  

이런 분위기의 차이가 사상 형성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유가사상이 인, 의, 예, 지  의 덕목을 설정하여 예교를 강조하면서 현실적인 상쟁대립이 전제된 반면,

도덕경의 사상은 상쟁의 대립이 인위적인 것으로 말미암아 생긴다고 보고,  무와  자연의 불상쟁 논리를

펴나간 것이다.    이러한 내용의 도덕경의 사상은 학문적인 진리 탐구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지만,

위' 진' 남북조시대처럼 사회가 혼란과 역경에 빠져 있을 때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의 지혜를 밝혀 주는

수양서러서도 받아 들여졌으며, 민간신앙과 융합되면서 피지배계급에게 호소력을 지닌 사상 및 세계관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우리나라 자료에는 삼국사기 '권24 백제본기 2'   근구수왕 즉위 년조에 근구수왕이 태자로 있을 때 

침입해 온 고구려 군을 패퇴시키고 계속 추격하려 하는 순간, 휘하의 장수 막고혜가 다음과 같이 

간언하였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듣기로는 도가의 말에, 족함을 알면 치욕을 당하지 않고, 멈출 줄 알면 위태해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제 얻은 것이 많은데 더 욕심을 내어서 무엇 합니까?"   이 말을 듣고 추격이 중지되었다고 하는데,

이 구절은 도덕경  제 44장에 나오는 말이다.

도덕경의  구절이 장수의 입에까지 오를 정도였다면 당시 사회에서는 상당히 광범위한 영향력을

가졌던 것임에 틀림이 없고,  나중의 일이지만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도 비슷한 내용의 시를 수나라 장수에게

보낸것이 삼국사기에 나타나 있다.

삼국유사  보장봉로조에는 당나라 고조가 고구려인의 오두미교 신봉  이야기를 듣고 624년 천존상과 함께

도사를 보내어 도덕경을 강론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그 이듬해 영류왕은 당나라로 사신을 보내어

불, 노 를 배우고자 하였고, 고조는 이를 허락하였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보장와이 연개소문의 건의에 따라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도교를 배우도록 하였는데, 

당나라 태종이 도사 8명과 도덕경을 보내자 왕은 기뻐하며 승사를 지어  도사를 거처하도록 하였다는

내용이 나타난다.

신라에서는 575년에 화랑도를 만들고 그 정신을 현묘지도라고 칭하였는데, '현묘'라는 말은 도덕경 제1장에

나오는 '혀지우현 중묘지문'에서 연상되는 용어로, 도가의 영향을 받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통일신라 말기의 혼란한 상황에서 도술연구에 골몰하였던 김가기에 대해서는 홍만조의 '해도이적'에

나타나 있는데,  그는 도덕경을 비롯하여 여러 선경을 계속해서 낭송하고 수련을 계속한 끝에 신선이 되었다고 한다.

고려 때는 왕 중에서도 도교신앙이 제일 돈독하고 재위 당시 도교가 융성하였던 예종이 청연각에서

한안인에게 명하여 도덕경을 강론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고려사 에 보인다.   유교경전과 대등하게 다루어서

강론시켰을 정도이므로,  당시 도덕경을 연구하던 사람의 숫자도 많았고, 수준도 높았으리라 짐작된다.

조선시대에 와서는 엄격한 주자학적 사상과 그 배타적 성격 때문에  도덕경에 대한 연구가 위축외었지만,

유학자들 가운데서 주석서를 펴내어 끊임없는 관심을 보여 주던 사람들이 있었다.

 

박세당은 신주도덕경 을 저술하였고,  이이는  도덕경 81장을 40여 장으로 줄여 순언  이라는 주석서를 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도덕경에 관한 관심은 희박하였는데,  그 이유는 자신 이외는 모든 사상을 이단으로

보는 성리학의 성격 때문이었다.  그러나 도덕경의 기본 흐름은 일찍부터 도교신앙과 접합되어 오면서

민중의식속에 깊이 뿌리박혀 기층의 민간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제 1 장

도라고 말할 수 있는 도는 변하지 않는 도가 아니고, 부를 수 있는 이름은 항상 변하지 않는 이름이 아니다.

이름이 없는 것은 천지의 처음이고,  이름이있는 것은 만물의 어머니다.  따라서 항상 욕심이 없는 것으로

묘를 보고, 항상 욕심이 있는 것으로 그 교를 이 둘은 같이 나왔으나 이름을 달리하며,  한가지로 일러서

현묘하다고 한다. 현묘하고 또 현묘한 것이 중묘의 문이다.

 

제 2 장

천하가 다 아름다워서 아름다운 줄 알지만, 이것은 추악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선하다고 해서 선한 줄 알지만

이는 선하지 않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서로 낳고,  어렵고 쉬운 것이 

서로 이루며, 길고 짧은 것은 드러나서 서로 비교되고, 높고 낮은 것은 서로 기울어지고, 음과 성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앞이 있어야 뒤가 따르는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성인은 작위가 없이 일을 처리하고, 무언의 가르침을

행한다.  천지자연은 만물을 활동하게 하고도 노고를 사양하지 않고, 만물을 생육하게 하고도 소유하지 않는다.

행하고도 자랑하지 않고,  공을 이루어도 공로를 자처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공은 그에게서 떠나지 않는다.

 

제 3 장

현명함을 받들지 않으면 백성들이 다투는 일이 없게 되고, 얻기 어려운 재물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면 

백성들이 도둑질하는 일이 없게 되며,  하고자 하는 욕심을 보여주지 않으면 백성들의 마음은 어지럽지 않다.

따라서 성인의 다스림은 그 마음에 욕심이 없게 하고, 그 배를 든든하게 해주며, 그 뜻을 약하게 하고,

그 뼈를 튼튼하게 하며, 항상 백성으로 하여금 아는 것도 없고 욕심도 없게 하여, 이는 자로 하여금 감히 하지 

못하게 한다. 무위의 다스림으로 다스려지지 않는 일은없다.

 

제 4 장

도는 비어 있어서 사용해도 늘 차지 않고,  깊어서 만물의 기본이다.  그 날카로운 것을 무디게 하고,

어지러운 것을 풀며, 그 빛을 부드럽게 하여 티끌에도 섞이지만 맑고 고요함이 그대로이다.

나는 그 도가 누구의 자식인지 알 수 없지만, 상제보다 먼저였던 것 같다.

 

제 5 장

천지는 어질지 않으니 만물로 추구를 삼고, 성인도 어질지 않으니 백성들을 추구로 삼는다.

하늘과 땅 사이는 풀무와 같아서 비어 있으나 다함이 없고, 움직일수록 힘이 더 난다.

말이 많으면 자주 막히게 되니, 가만히 있는 것만 못하다.

 

제 6장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으니,  이를 일컬어 현빈이라 한다.

현빈의 문은 천지의 뿌리라고 이르며, 끊임없이 존재하느 것 같아서 아무리 써도 지치지 않는다.

 

제 7장

하늘은 영원하고 땅은 오래다.   천지가 영원하고 오랜것은 스스로 자신이 살려고 애쓰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원할 수 있는 것이다.  성인은 자신을 뒤에 있게함으로 앞서고,  자신이 떠나 있으므로

실로 자신이 거기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사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제 8장

최상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에게 이로움을 주지만, 다투지 않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낮은 곳에

자리한다.  그러므로 물은 도에 거의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사람이 사는 곳으로는 땅이 좋고, 

마음은 연못처럼 깊어야 좋고, 더불어 함께하는 것에는 어짊이 좋고, 말은 믿음이 있어야 좋고,

움직임은 적당한 때를 맞추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하는 것이 다투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잘못됨이 없는 것이다.

 

제 9장

가득 찬 것을 무리해서 계속 유지함은 그것을 그만 두는 것보다 못하다.    두들겨 날카롭게 하면 오래가지

못하고,  금과 옥이 집안에 가득하다고 그것을 계속 지킬 수는 없다.   부귀하여 교만하게 되면 스스로 

재앙을 남긴다.  일을 이루면 몸이 물러나는 것이 하늘의 이치다.

 

제 10장

혼백을 하나로 안아 떨어져 나감이 없고,  기운을 다하여 더없이 부드럽기가 한이 없다.  욕망의 때가

낀 마음을 씻어내니 아무런 잘못이 없고,  백성을 사랑하고 나라 살림살이를 무위의 마음으로 한다.

하늘의 문이 열리고 닫힘에 여자와 같이 되고, 명백하여 막힘이 없으니 사방으로 통하여 아는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낳고 기름에 있어서 낳아도 소유하지 않고, 해놓고도 자랑하지 않고, 

자라도 거느리지 않으니 이것을 현덕이라고 한다.

 

제 11장

서른 개의 바큇살이 바퀴통에 함께 있지만, 비어 있어서 바퀴통 복판은 쓸모가 있고, 찰흙을 이겨

그릇을 만드니,  비어 있어서 그 가운데가 쓸모가 있다.  문과 창을 만들어 방을 만드니, 비어 있기 때문에

그 안이 방으로 쓸모가 있다.   그러므로 모양이 있는 것이 쓸모가 있음은 없는 것이 쓸모가 있기 때문이다.

 

제 12장

오색의 찬란함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오음의 아름다운 소리는 사람의 귀를 멀게 하고, 오미의 좋은 맛은

사람의 입을 상하게 한다.   말을 타고 사냥하게 되면 사람의 마음을 발광하게 하고,  얻기 어려운 재물은

사람의 행실을 나쁘게 한다.   이로써 성인은 배를 채울 뿐 겉치레를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제 13장

은총도 굴욕도 놀라운 일과 같이 하고, 재앙을 귀하게 여기는 것을 제 몸과 같이 한다.

무엇을 일러서 은총과 굴욕을 놀라운 것처럼 한다고 하는가.

사랑은 위에서 아래로 행하여지므로 얻어도 잃어도 조심하며 놀랍게 여기라는 것이니,

이래서 은총과 굴욕은 놀라운 일을 당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무엇을 일러서 재앙을 귀하게 여기는 것을 제 몸과 같이 한다고 하는가.

자신에게 재앙이 있는 것은 자신의 몸이 있어서이니 몸이 없으면  자신에게 재앙이 있을 수 없다.

자신의 몸을 소중히 하듯이 천하를 소중하게 여기면 천하를 맡길 수 있고,  몸을 사랑하듯이 천하를

사랑하면 천하를 부탁할 수 있다.

 

제 14장

보이지 않는 것을 일컬어 이라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일컽어 희라 하며, 잡아지지 않는 것을 일컽어

미라 하는데 , 이 셋은 밝혀지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합하면 하나가 된다.  그 위가 밝지 못하고, 

그 아래는 어둡지 않고 무한하여 무물로 복귀한다. 이것을 일컽어 무상지상이나 무물지상이라 하고,

이를 일컽어 황홀이라 한다.  맞이해도 그 머리를 보지 못하고,  따하가도 그 뒤를 보지 못하니,

옛날의 도를 지켜 지금의 것을 다스린다.  옛날과 시작의 근본을 아는 것,   이것이 도의 본질이다.

 

제 15장

예로부터 바르게 선비가 된 사람은 미묘하고 현통하여 그 깊이를 알 수가 없다.

깊이를 알 수 없기에 그 모습을 억지로 그려보면, 겨울에 냇물을 건너가는 것과 같이 조심스럽고,

더하여 주위를 두려워하는 것과 같다.  위엄이 있어서 감히 함부로 할 수 없는 손님과 같고,

어질어서 장차 풀리려는 얼음과 같다.  도탑기는 통나무와 같고 공허하여 텅 비어 있는 골짜기와 같으며,

한데 섞이는 것은 마치 흐린 물과 같다.   흐린 물을 서서히 맑아지게 하는 그런 무위의 일을 그 누가 하겠는가.

조용한 가운데 움직임이 있어 서서히 자라듯이 그런 무위의 일을 누가 하겠는가?

도를 품고 있는 사람은 가득 채우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렇게 채우기를 바라지 않기에 낡아도 새롭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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