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명상

4. 진리의 세계

by 심신건강 2025. 1. 11.
반응형
반응형

연기법은 인연법 또는 인과법이라고도 한다.  모든 것은 독자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상호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진리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바로 이런 연기의 법칙, 즉 서로 원인과 결과가 되어 서로 의존하며

생겨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산너머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홀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섶에 붙은

불 때문에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김으로써 저것이 생긴다'는 말은 존재의 생성을 설명하고,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짐으로써 저것이 사라진다'는 말은 존재의 소멸을 설명한다.

이처럼 연기법은 존재의 '생성과 소멸의 상호 관계성'의 진리를 밝혀준다.

이 연기법에 따르면, 고통과 슬픔은 홀로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신의 뜻이나 숙명에 따르는 것도 아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그럴 만한 원인과 조건이 있게 마련이다. 뉴욕 센트럴 파크에서 홍수가 나는 원인은

북경에서 나비가 날잿짓을 했기 때문이라는 '나비효과'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경전에서는 이와

관련하여 한 알의 겨자씨에 수미산이 포함된다고 했다.   하나의  티끌에 시방세계가 들어간다고 했다.

그만큼 아무리 사소한 하나의 파동, 하나의 물결, 하나의 날갯짓일지라도 그것이 우주의 움직임과

관련된다는 연기의 원리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렇듯 어떤 사소한 원인이든 그것은 여러 가지 조건과 

결합되어 커다란 결과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부처님은 '어떠한 이유가 있어서 늙음과 죽음이 있는 것이며, 어떠한 법을 조건으로 하여 늙음과 죽음이

있는 것일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깊은 사유와 명상을 통해 마침내 그 해답을 찾아낸다.

십이연기가 바로 그것이다.

십이연기는 중생의 삶이 12가지로 윤회하는 과정이다.   12가지가 무엇인지 종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무명 - 행 - 식 - 명색 - 육입 - 촉 - 수 - 애 - 취 - 유 -  생 - 노사

 

부처님은 연기의 법칙은 당신이 만든 것이 아니며, 부처가 세상에 나오든 나오지 않든 간에 진리로서

변함이 없으며,  당신은 다만 이 진리를 깨달았을 뿐이라고 하셨다.  요컨대 연기법이 세계와 존재에 

대한 불변의 진리임을 강조하신 것이다.

아함부 경전에 '연기를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연기를 본다.   그리고 연기를 보는 자는

부처를 본다' 는 구절이 있다.   이 말씀은 수행자 고타마가 연기의 진리를 깨달아 비로소 부처가 

되었으며, 그 깨달음의 핵심이 바로 연기법임을 잘 말해준다.

연기법은 사실 세계의 현상관계만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어떠한 사유에서 고통과 불행이 생겨나고,

어떻게 하면 그것을 극복하여 즐거움과 행복의 이상에 도달할 수 있는가 하는 인생의 실상을 바르게

깨닫게 해준다.    인생의 실상을 바르게 알고,  바른 인생관에 따라 노력하고 수행해서 깨달음을 

성취하도록 인도하고 있는 것이다.  또 연기법은 모든 것이 서로 관계를 맺으면서 공생하므로, 나만이

아닌 너의 소중함을 일깨우며 닌간과 자연계의 공생관계를 설명한다.   연기의 입장에서 볼 때 모든것은

각각 주인이요 소중한 존재이다.  그러나 각각의 소중함은 여러 대상들과의 관계속에서 이루어지는

상호 신뢰와 상호 존중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연기의 도리를 이론이 아닌

몸과 마음으로 깨우치기 위해 수행하는 것이다.

 

3. 중도  - 극단을 떠난 바른 길

 

제자들아,  그대들은 두 극단으로 달려가서는 안 되나니, 그 둘이란 무엇인가?

온갖 욕망에 깊이 집착함은 어리석고 추하다.  범부의 소행이어서 성스럽지  못하며 

또 이로움이 없느니라.   또한 스스로 고행을 일삼으로 오직 괴로울 뿐이며, 역시 성스럽지 못하고

이로움이 없느니라. 

나는 이 두가지 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깨달았으니, 그것은 눈을 뜨게 하고 지혜를 생기게 하며,

적정과 증지와 등각과 열반을 돕느니라, 

---  잡아함경 ---

 

중도는 쉽게 말해서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불교 에서는 유 와 무 어느 한쪽에 

치웇치지 않는 진실한 도리,  고와 낙의 양쪽을 떠난 올바른 행법을 가르친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은 직후, 수행자 시절에 함께 수행하다 떠난 다섯 명의 수행자를 찾아가 처음으로 

설법을 하셨다.  이를 초전법륜이라고 하는데,  그 내용은 중도와 사성제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다면 중도와 사성제는 부처님이 깨친 연기법과 어떤 관계에 있을까?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는 당시 인도 사회의 분위기를 알아야 한다.   부처님 당시의 인도 사회는 사상적으로

매우 혼란스러웠다.  전통 사상가와 육사외도를 비롯한 신흥 사상가들은 크게 상주론과 단멸론으 나뉘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고정불변의 개별 아인 아트만의 끊임없는 윤회를 인정하는 부류는 상주론을 주장하고,

윤회를 부정하고 한 번의 생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는 부류느 단멸론을 주장했다.

상주론을 주장하는 사상가들은 엄격한 고행을 통해서만 우주의 주체자인 브라만과 아트만이 합일할 수 있다는

주장 아래 고행주의를 강조한 반면,  모든 것은 단 한 번의 생으로 끝나다고 주장하는 부류들은 인과를 부정하고

현실에서 쾌락을 즐겼다.    이런 상황에서 부처님은 왕위가 보장된 왕궁을 떠나 6년 동안 고행주의 수행을 택했다.

그런데 자신의 몸을 학대하는 고행의 수행법이 결코 깨달음에 이르는 바른 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그 수행을

중단하였다.   그러자 당시 함께 수행하던 다섯 명의 수행자들은 '고타마가 타락했다'며 부처님을 비난하고

 떠나버렸다.  그래서 고행주의에 빠져 있던 그 다섯 비구에게 양 극단을 벗어난 올바른 길을 가르치는 것이 그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쉽게 이해시키는 첩경이었던 것이다.    즉  중도와 사성제는 설법을 듣는 대상의 근기에 맞게

연기법을 정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여기에 중도의 중요한 가치가 숨어 있다.

'연기는 곧 중도다' 라는 말이 있다.   중도란 양 극단을 떠나 조화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요, 조화로운 관계는 바로 나와 너를 고집하지 않고 상호 연결되는 연기 관계를 일컫는 것이기 때문이다.  연기에 입각해야만 중도의 자리에 서게 된다.

사성제 또한 인과의 법칙,  즉  연기의 법칙으로 이루어져 있다.   중도, 연기, 사성제는 입장에 따른 차이일 뿐

그 근본 구조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 중도의 가르침을 구분하여 '고락중도'  '단상중도' '유무중도' 라고 한다.   고행주의와 쾌락주의라는 극단,

단멸론과 상주론이라는 극단,  유 아니면 무라는 극단을 떠난 길이 바로 중도이다.

여기서 지적하는 세 가지는 부처님 당시에 횡행하던 극단적 사상과 사조를 말한다.

그러면 어떻게 중도를 실천할 것인가?

중도를 양 극단의 가운데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중간일 뿐 중도가 아니다.  예를 들어 

흑백논리가 틀리기 때문에 어중간한 회색논리를 펴는 것은 옳지 않다.  중도는 잘못된 것을 떠나 옳은 위치에

서는 것이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중도는 곧 정도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이 중도는 나와 너,  옳음과 그름,

이것과 저것, 내편과 네 편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갈등하는 고통을 치유하는 바른 길이다.  즉, 중도의 실천으로

제시된 것이 바로 팔정도이다.   고행주의와 쾌락주의의 양 극단을 떠난 바른 길이 바로 팔정도며, 

이 팔정도는 사성제와 연결되어 있다. 

부처님은 내세나 영혼의 문제와 같은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해서는 침묵하셨다.

이를 무기라고 한다.   이런 질문에 대답하면 삿된 소견이나  의혹만 더해질 뿐이며,  연기와 중도의 자리에 서야만

진실을 볼 수 있다고 설하신다.   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독화살의 비유를 들어 그와 같은 형이상학적인 

논의에 얽매이기보다 올바른 생활과 수행,  즉 중도의 실천을 통해 해탈의 길을 찾으라고 권하신다.

독화살을 맞은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독화살을 빼고 상처를 치료해야 한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독의

성분과 화살이 날아온 방향 등을 알아야 한다며 독화살 빼는 것을 늦추니 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삶도 마찬가지다.  팔정도를 통해 중도를 실천함으로써 하루빨리 깨달음에 다다라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중도는 부처님의 초전법륜에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릇된 견해나 극단의 견해를 떠난 

바른 견해와 실천을 제시하여 올바른 삶을 살도록 하는 중요한 가르침이다.  성철 스님의 말씀처럼

중도는 시비선악 등과 같은 상대적 대립의 양쪽을 버리고, 그의 모순, 갈등이 상통하여 융합하는 절대의 경지로서

불자들이 추구해야 할 바이다.

 

4. 삼법인  --  존재의 참모습

 

부처님은 흙을 조금 손톱위에 얹어 놓고 그 비구에게 보이면서 말씀하셨다.

"비구여,  겨우 이 정도의 물질이라 해도,  이 세상에 항상 존재하여 변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비구여, 만약 손톱 위에 얹어 놓은 이 정도의 물질에서 항상 존재하여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내가

가르치는 청정의 행으로 고를 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비구여, 겨우 이 정도의 물질이라도 항상

존재하며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가르침인 청정행을 따른다면 충분히 고를 멸할수 있으리라.

-- 중일아함경 --

 

우주 만유를 관통하는 법칙이 연기법이라면 존재의 실상을 나타내는 것이 바로 삼법인이다.

삼법인은 '세 가지 진실한 가르침'이란 뜻이다.   

도장 인  자를 쓴 것은 도장이 언제나 똑같이 찍히듯이 부처님의 가르침도 언제 어디서나 똑같다는 뜻이다.

바꾸어 말하면 삼법인은 불교의  인감도장인 셈이다.

삼법인에는 모든 것이 변한다는 제행무상,  모든 변하는 것에는 실체가 없다는 제법무아,  그리고 거기에다

변하는 모든 것은 괴로움을 낳는다는 일체개고를 넣거나 일체개고 대신 모든 괴로움을 없앤 열반직정을 

넣기도 한다. 때로는 이 네 가지를 다 넣어 사법인 이라  부르기도 한다.

 

첫째, 제행무상은 세상의 모든 것이 변한다는 뜻이다.   한때 '인생무상' 이란 말이 유행어가 된적이 있는데,

그 때의 무상은 '허무하다'는 뜻으로 제행무상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제행무상은 모든 존재의 속성이

항상 그대로 있지 않고 변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때 드러나는 존재의 속성은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천년만년 죽지 않고 살 것처럼 생각한다.  권세, 명예, 재산도 영원할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의 죽음을 경험하거나 권력가나 재벌가의 몰락을 지켜본 사람은 모든 것이 변한다는

평범한 진리 앞에서 겸허하게 마음을 비운다

 

둘째, 제법무아는 모든 변하는 것에는 자아라는 실체가 없다는 무아의 가르침이다.

모든 것은 항상 변하기 때문에, 즉 인연 따라 생긴 것은 인연이 다하면 흩어지기 때문에 고저울변의 실체란 없다.

무아의 가르침은 우리에게 자기 중심적 사고와 아집이 허망한 것임을 일깨워준다. 

무아가 되어 나를 텅 비우고 아빕과 소유욕을 버리면 인연으로 형성된 존재의 실상을 깨칠 수 있다.

모든 사람과 사물이 어우러져 더불어 사는 삼라만상의 세계를 깨닫게 되면, 인류의 화합과 평화가 앞당겨질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변하는 모든 것은 괴로움이라는 일체개고이다.  즉  무상하기 때문에 괴롭다는 것이다. 

세상사는 희로애락이 다 있어 괴로움만 이씨는 것이 아닌데,  왜 모든 것을 고통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기쁨과 즐거움은 일시적인 것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영원할 것이라고 믿고 그것에 집착

하기 때문에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모든 것음 변하므로 고정불변의 실체가 없다.  

기쁨과 즐거움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중생은 언제나 자기 중심의 습성에 길들어 있어서 기쁨과 즐거움을 어떻게든 지속시키려고 애쓴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그렇게 발버둥쳤어도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진시황뿐 아니라 

동서고금의 영웅호걸에서부터 미천한 신분의 사람의 이르기까지 모두가 항상 풍족하고 즐겁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부처님께서는 인간이 가진 이루어지지 않는 욕망을 간파하시고, 모든 것이 괴로움이라고 설파하신 것이다.

때문에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욕망의 불을 끄고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단면, 모든 고통이 사라지고

마음은 평안을 구할 수 있다. 

 

마지막은 열반적정이다.  열반은 진리의 구현이다. 무상과 무아의 진리를 완전히 깨쳐 모든 번뇌와 고통의 불을

끈 상태가 바로 열반이다. 혈반은 깨달음을 성취하여 모든 번뇌와 욕망,  대립과 고통이 사라진 고요한 평화의

상태를 말한다.

 

불자들은 삼법인의 가르침을 자신의 생활에 구현하여, 최상의 평화와 대자유인 열반을 향해 

부지런히 정진해야 한다.

 

 

 

5.  사성제와 팔정도 -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  

 

연기와 삼법인의 가르침은 세상의 본래 모습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 진리를 구현하는 수행의 길을 가르쳐주는 것이 바로 사성제이다.

사성제란 '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라는 뜻으로, 부처님이 바라나시 녹야원에서 다섯 비구에게 행한

첫 설법의 내용이기도 하다.  사성제는 듣는 사람이 쉽게 이해하도록, 부처님께서 연기법의 진리를 현실에 맞게

응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네 가지 진리가 있다.   무엇이 네 가지 진리인가?   이른바 괴로움의 진리,  괴로움이 일어나는 원인에 대한 진리,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진리,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에 대한 진리를 말한다.

 

사성제란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소멸과  괴로움의 소멸 방법에 대한 가르침이다.  

그래서 이를 줄여서 고. 집. 멸. 도,  사성제라고 한다.  이 네 가지는 서로 두 가지씩 원인과 결과를 이루며,

현실세계와 이상 세계의 대비를 설명하고 있다.

삼법인에서도 설명했듯이, 인간은 생로병사의 고통 속에 있다.  이간에게는 이 네 가지 고통 외에도 여러가지

고통이 있다.  이것이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의 현실이다.   이것이 고성제이다.

 

그러면 고통의 원인을 없애고 열반에 이르는 길은 무엇인가?

열반으로 가는 길은 여덟 가지가 있으니,  바로 도성제인 팔정도가 그것이다.

팔정도란 여덟 가지 바른 수행의 길이라는 뜻으로 다음과 같다.

1) 정견  :  바른 견해로 편견 없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으로 여실지견이라고 부른다.

사무를 바로 보는 것이 바른 삶의 시작이다.  바른 가치관이 확립될 때 우리는 어떻게 사유하고 행동해야 하는지

그 길이 보인다.

2)정사유  :  바른 생각이다.  바른 견해를 가져야만 바른 생각을 할 수 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이치에 맞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행동하기 전에 깊이,  그리고 바르게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한다.

3)정어    : 바른 말이다.

4)정업   : 바른 행동이다.  모든 행동을 바르게 해야 한다.

5)정명   : 바른 생활,  즉 바른 직업이다.

6)정정진 :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 쉼 없는 노력을 말한다.

7)정념   :  바른 마음챙김이요,  바른 마음 집중이다.

8)정정   :  바른 선정이다.   마음챙김과 마음 집중을 통하여 마음이 바른 삼매의 상태에 들어가 고요한 평정에 

머무는 것이다.  정정의 상태에서 지혜를 얻게 된다. 

 

사성제와 팔정도는 고통의 세계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반응형

'명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노자 - 노자도덕경에 대하여  (0) 2025.01.11
6. 업과 인과  (0) 2025.01.11
3. 진리를 향한 정진  (0) 2025.01.10
2. 불교란 무엇인가  (0) 2025.01.10
인류의 4대 종교 - 1. 불교  (0) 2025.0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