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그대 눈얖에 나타나지는 않았지만 씨앗 속에는 꽃의 아름다움이 들어 있다. 그대가 꽃을
원한다면 씨앗을 소중히 여겨라. 따라서 먼저 받아들임이 중요하다. 이해와 깨어 있음이 필요하다.
그때라야 비로소 진정한 몰두와 심취가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정말로 이상한 것이 또 한 가지 있다. 그것은 탄트라의 가장 깊은 비밀 중의 한 가지이다.
그대가 적으로 삼는 것은 무엇이든지 - 분노, 탐욕, 증오, 성욕 따위 - 그대보다 더 강한 적이 되고 만다.
그러므로 그대의 적으로 여겼던 것을 신이 준 선물로 생각하고 감사하라. 예를 들어 탄트라는 섹스
에너지를 변형시키기 위해서 많은 테크닉을 개발시켰다. 성행위를 시작하는 것을 마치 신성한 사원에
다가가는 것처럼 행동하라. 마치 기도처럼, 명상처럼 하라. 그것의 거룩함을 느껴라. 카쥬라호 사원에
있는 마이투나 조각상들이 바로 그것이다. 사원의 벽면에 섹스행위를 묘사해 놓은 것은 기독교인들에나
회교도, 자이나교도들에게는 매우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어떻게 거룩한 사원이 돌로 조각된 섹스행위로
가득 차 있을 수 있는가? 성당이나 교회, 혹은 절에 그런 것들이 있다고 생각해 보라. 아마 그대는
상상도 못해봤을 것이다.
현대의 힌두교들 역시 그것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인도가 백년 이상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그들은 사실상 힌두기독교인들이다. 그들의 지도자 중의 하나인 푸르쇼타마디스
탕돈은 카쥬라호 사원을 파괴해야 한다고 떠들어 댔다. 그것은 인도인의 것이 아닐라고 말이다.
사실 탄트라는 오랫동안 우리들의 가슴속에 숨어서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수세기 동안 주류가 되지 못했다.
반면에 요가는 인도인의 정신적 주류가 되었다. 그래서 요가는 카쥬라호를 용납할 수 없다.
탄트라는 마치 그대가 거룩한 성전에 들어가는 것처럼 섹스 행위속으로 들어가라고 말한다.
그래서 성저에 섹스 행위들을 묘사해 놓은 것이다. 그들은 정말로 그러했다. 그대가 성전에 들어갈 때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섹스 역시 거기에 있어야 한다. 거기에 어떤 것도 제외되거나 억압
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면 온전한 하나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과 신성이 서로 싸우는 두 가지
반대 극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것들은 겉으로는 마치 반대 극처럼 보일 것이다. 그리고 반대 극처럼
보일 때만이 그것들은 존재할 수 있다. 만약 양극성이 사라진다면 온 세상이 사라진다.
그리고 오직 하나만이 있을 뿐이다. 극단적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지 마라. 깊은 곳에서 흐르는 하나됨의
흐름을 보라.
탄트라에서는 모든 것이 신성하다. 이 점을 명심하라. 탄트라에서는 신성하지 않은 것이 없다.
탄트라의 눈으로 바라보라. 그러나 비종교적인 사람에게는 모든것이 부정하다. 어떤 것도 거룩하지 않다.
한 기독교 선교사가 어느 날 내게 와서 말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물었다.
'죄는 누가 만들었는가?'
그가 곧바로 대답했다.
"악마가!"
그래서 나는 또 물었다.
"그러면 악마는 누가 만들었는가?"
그러자 그는 어쩔 줄 몰라했다. 한참 있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악마도 하나님이 만들었습니다."
악마는 죄를 만들었고 하나님은 악마를 만들었다. 그러면 누가 진짜 죄인인가?
악마인가? 하나님인가? 그러나 이런 이원론자들은 언제나 말도 안되는 개념을 고집한다.
탄트라에서는 신과 악마가 둘이 아니다. 탄트라에서는 '악마'라고 부를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신성하다. 이것이 올바른 관점이며 건강한 시각이다. 만약 이 세상에 어떤 부정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어디에서 나왔겠는가?
그러므로 양자 택일의 길밖에 없다. 첫번째는 모든 것이 부정하다고 말하는 무신론자가 있다.
이 태도 역시 좋다. 적어도 그는 이원론자는 아니다. 그는 이 세상에서 어떤 거룩함도 보지 못한다.
또 한 가지는 탄트라의 태도이다. 모든 것이 거룩하다는 입장이다. 그는 종교적인 사람이다.
이 두 가지 외에 다른 선택은 있을 수 없다. 종교적인 사람과 비종교적인 사람만이 있을 뿐이다.
만약 이 세상에 단 하나의 세포나 원자라도 부정한 것이 있다면 그때 이 세상은 완전히 부정한 것이
되고 만다. 세포 하나, 원자 하나라도 이 세상과 동떨어져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아니 본래 하나이다. 단지 여러개라고 보는 것은 우리 시각의
한계 때문이다. 그래서 이 세상을 온전히 거룩한 것으로 보든지 아니면 완전히 부정한 것으로 보든지
두 가지 관점밖에 없다. 어떤 것은 부정하고 어떤 것은 거룩하다고 본다면 그것은 철저하게
살펴보지 않은 것일 뿐이다.
그래서 여기에 두 개의 길이 있다. 하나는 탄트라이고 다른 하나는 요가이다.
탄트라는 우리의 표면적인 의식 때문에 별로 호소력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무의식이
정말로 건강하고 혼돈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탄트라가 너무나 아름답게 비칠 것이다.
오직 그 사람만이 탄트라가 무엇인지 진실로 이해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혼란스런 마음에는 차라리 요가가 더 설득력이 있다.
어떤 것에 매력이 있고 없고는 우리의 마음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결정권을 갖고 있는 자는 바로 그대이다. 내가 지금 요가를 통해서는 깨달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요가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궁극에 이를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유행하는 요가는 '아니올시다' 이다.
그 요가는 진정한 요가가 아니다. 그대의 병든 마음이 내린 해석에 의해 지금의 요가는 왜곡되어 있다.
올바른 요가라면 그대는 자동적으로 궁극에까지 이를 수 있다. 하지만 그것 역시 그대의 마음이
건강할 때만이 가능하다. 단지 탄트라와 가는 길이 틀릴 뿐이다.
예를 들면 마하비라는 요가의 길 위에 있다. 그러나 그는 성을 억압하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알았고
그것과 함께 살았다. 하지만 그것은 그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그에게서 섹스가 떨어져나가
버렸다. 붓다 역시 요가의 길 위에 있다. 그는 이 세상 속에서 살았고 그것을 깊이 이해했다.
그는 결코 그것과 싸우지 않았다.
그대가 한번 알고 나면 그대는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그렇게 되면 마치 낙엽이 떨어지듯 그것은 그대에게서 떨어져나가 버린다.
다시는 그것으로 인해서 신경쓰일 일도, 싸울 일도 없다. 붓다의 얼굴을 보라. 그것은 싸우는 사람의
얼굴과 다르다. 그 얼굴은 완전히 이완되어 있는 얼굴의 상징이다.
그러나 그대 주위에 있는 요기들을, 수행자들을 한번 보라. 그들의 얼굴에는 싸움과 갈등의 표정들이
역력하다. 그들은 마치 화산 위에 앉아 있는 것 같다. 그들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면 그대는 확연히
느낄 수 있다. 그들은 병든 마음을 깊숙이 억누르고 있다. 그들은 초월해 있는 것이 아니다.
건강한 세계는 남을 흉내내지 않고 자신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사람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때 그들은 삶을 통해서 자신의 욕망들을 변형시킬 수 있는 깊은 감수성을 배울 수 있다.
모든 욕망의 껍질들이 떨어져나가고 본질의 에너지가 변형되어 초월하는 경험에게까지 이르게 된다.
그리고 나에게는 탄트라가 이끌어 줄 수 있는 세계를 요가도 충분히 이끌어 줄 수 있다. 이 점을 기억하라.
우리는 건강한 마음이 필요하다. 자연인이 필요한 것이다. 자연인이 사는 세계에는 탄트라와 요가가
욕망을 초월할 수 있는 경지에까지 이르는 방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사회처럼 병든 사회에서는 요가도 탄트라도 그 어떤 것도 제구실을 할 수가없다.
단지 그때 그때의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처방전 역할만 할 뿐이다. 그래서 우리가 만일 요가를
선택한다면 그것은 억압하는 기술로 사용하기 위해 채택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탄트라를 선택한다면 그때는 마음껏 정욕을 발산하기 위한 수단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병든 마음에는 요가도 탄트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것들은 모두 자신을 속이는 데
쓰이는 하나의 사기행각일 뿐이다. 그래서 건강한 마음, 특히 성적으로 건강한 마음이 필요하다.
그런 다음에는 요가와 탄트라 중 그대의 기호에 따라 무엇이든지 선택할 수 있다.
인간에게는 기본적으로 두 가지 유형이 있다. 그것은 남자와 여자이다.
물론 나는 지금 생물학적 구분을 하는 것이 아니다.
심리학적 구분을 하는 것이다. 사람들 가운데는 기본적으로 남성의 심리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공격적이고 외향적이며 적극적인 사람들이다. 그들은 공격적이고 외향적이며 적극적인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요가가 적합하다. 그와 반대로 여성적인 심리를 가진 사람들,
즉 수용적이고 비폭력적이며 소극적인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탄트라가 맞는 길이다.
그래서 탄트라에는 여신들이 많이 나온다. 어머니 칼리 여신, 타라 보살, 그리고 수많은 데비들과
바이라비들이 나온다. 그러나 요가에서는 여신의 이름은 취급도 하지 않는다.
요가에서는 남신들이 많이 나오고 탄트라에서는 여신들이 많이 나온다.
요가는 밖으로 분출하는 에너지이고 탄트라는 내면으로 흐르는 에너지이다.
그래서 심리학적 용어를 붙이자면 요가는 외향성이고 탄트라는 내향성이다.
그래서 각자의 성향에 맞게 길을 선택하면 된다. 그대의 성격이 내향성이라면 싸움은 그대에게
맞는 길이 아니다. 만약 그대가 외향성이라면 그때 싸움이 그대에게 적격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마구 섞여 있다. 우리는 군중 속에 들어 있는 하나의 개체일 뿐이다.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하나의 개인이 아니다.
전부가 뒤죽박죽 섞여 있다. 요가가 그대를 들쑤셔 놓고 탄트라가 그대를 뒤숭숭하게 만들어 놓았다.
모든 악들이 그대의 병을 고친답시고는 새로운 부작용만 만들어 놓았다. 지금 내가 하는 말은
요가를 통해서 그대가 도달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내가 여기서 탄트라를 강조하는 이유는
탄트라가 무엇인지 확실히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다!!!
** 호흡, 우주에 이르는 다리 **
시바가 대답한다.
빛의 샘, 그 황홀한 일별은 들이쉬고 내쉬는
숨 사이에서 찾을 수 있도다
숨이 들어오고, 들어온 숨이 나가려고 하기 직전,
바로 거기에 지복이 깃들어 있도다.
숨은 들이쉴 때 아래에서 위로 반원을 그리며 회전한다.
그리고 내쉴 때 다시 위에서 아래로 반원을 그린다.
이 두 개의 회전점을 통해서 불생불멸의 그 자리를 깨달을 지어다.
들이쉬고 내쉬는 그 찰나의 사이에 호흡은 에너지가 없으면서 또한
에너지로 가득 찬 그대의 중심에 닿는도다.
숨을 완전히 내쉰 뒤 호흡이 멎었을 때,
또는 숨을 완전히 들이쉰 뒤 호흠이 멎었을 때,
호흡의 이 우주적인 멈춤 속에서 에고는 사라진다.
** 다섯 개의 신비 **
미간에 집중하고 마음을 사념이 일어나기
전의 상태에 머물게 하라.
정수리까지 호흡의 정수로 가득 차게 하라.
그리고 정수리에서 빛이 쏟아지듯
호흡의 정수가 쏟아지고 있음을 느껴라.
일상적인 활동 속에서도 들숨과 날숨 사이에 항상 유념하라.
이 수련을 계속하면 머지않아 그대는 다시 태어나리라.
만져지지 않는 호흡의 정수는 미간에 있다가
그대가 잠드는 순간 가슴으로 내려온다.
그리고 꿈의 세계를 넘고 죽음의 세계까지 넘어간다.
지극한 경배와 헌신으로 호흡의 두 교차점에 집중하라.
그리고 '아는 자'를 알아라.
** 그대의 마음을 쉬게 하는 방편들 **
사라의 달콤한 애무를 받을 때 사랑 자체가 되면
어여쁜 공주는 영원한 생명 속으로 들어간다.
개미가 기어가는 것을 느낄 때 감각의 문을 닫아라.
그때 그것이 일어나리라.
침대에 눕든지 자리에 앉든지 그대 자신을
무중력 상태에 있게 하라. 그때 마음을 넘어선다.
** 중심에 이르게 하는 방편들 1 **
무한한 허공 속에서 오색찬란한 공작의 꼬리 깃털이 그대의
오감이 되었다고 상상하라. 이제 그 아름다운 색채가 그대의
내면으로 들어오게 하라. 그리고 한 점을 정하여 거기에서 만나게 하고
그 점을 집중하라. 그 점이 허공 속에 있든지 벽 위에 있든지 어디에
있든지 상관없다. 그 점이 사라질 때까지 그렇게 하라. 그때 또 다른
것을 향한 그대의 바람이 실재가 되어 나타나리라.
그대의 신경 전체에 온 주의를 집중시켜라. 연꽃 뿌리 속에 들어 있는
실처럼 섬세한 신경이 척추 속에 있다. 그대의 의식이 척추의 중심에
머무를 때 변형이 일어난다.
인간은 중심을 갖고 태어난다. 그러나 인간은 살아가면서 그 중심을 한번도 느끼지 못하고
생을 마치는 수가 허다하다. 인간은 자신의 중심을 몰라도 살아갈 수가 있다.
하지만 중심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중심은 인간과 존재계의 연결 고리인 것이다.
그것은 뿌리이다. 그대는 그것을 알지 못할 수도 있다. 지식은 중심을 아는 데는 본질이 못된다.
그러나 그대가 그것을 모른다면 뿌리 없이 떠도는 삶이 될 것이다. 그때 그대는 존재를
받치고 있는 어떤 토대도 느껴보지 못할 것이다. 그대의 기초가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대는 이 우주에서 한번도 진정한 느긋함을 맛보지 못할 것이다. 그대는 집 없는 떠돌이이다.
물론 중심은 거기에 있다. 하지만 그것을 알지 못한다.
그대의 삶은 그저 의미없고, 공허하며, 이르러야 할 곳이 아무데도 없는 부평초의 삶이 되고 만다.
그대의 삶은 죽음을 기다리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한 순간에는 다음 순간으로 그대는 계속 미룰 수 있다. 하지만 미루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그대는 잘 알고 있다. 그대는 단지 세월만 보내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깊은 좌절감은 그대를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다. 인간은 중심을 갖고 태어나지만 그것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대는 중심을 갖고 있다. 중심은 거기에 있다. 그대는 중심 없이 존재할 수 없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그대와 존재계를 연결해 주는 다리 없이 어떻게 그대가
존재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신성에, 혹은 불성에 뿌리를 박고 있다. 그리고 매순간
그 뿌리를 통해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그 뿌리는 깊이 묻혀 있다.
어떤 나무든 그 뿌리는 보이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나무는 자신의 뿌리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대 역시 뿌리를 가지고 있고 그 뿌리가 그대의 중심이지만 그대는 그것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말하는 것은 그대가 그 뿌리를 알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대가 자신의 중심을 인식하게 되면 그때 그대의 삶은 깨어나기 시작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대의 삶은 깊은 잠 속에 있는 한편의 꿈이 될 것이다.
에이브라함 마슬로우는 인간의 욕구를 다섯 단계로 나누고 그 마지막 단계를 자아실현의
욕구라고 말했다. 그것은 전 우주와 연결된, 그대의 뿌리, 그대의 중심을 알고 싶은 욕구인 것이다.
그대는 혼자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그대는 이 우주의 한 부분이다. 그리고 이 우주는
외계가 아니다. 그대는 이 우주의 한 부분이다. 그리고 이 우주는 외계가 아니다.
그대는 이방인이 아니다. 이 우주는 그대의 집이다. 하지만 그대가 그대의 뿌리를 찾지 못하느 한,
이 우주는 그대와 아무 상관없는 외계로 존재할 것이다.
샤르트르는 "인간은 이 세계에 재버려졌다" 라고 말했다. 물론 그대가 자신의 중심을 모른다며
그대는 내버려졌다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그대는 아웃사이더이며 주인공이 아닌 엑스트라일 뿐이다..
그대는 아웃사이더이며 주인공이 아닌 엑스트라일 뿐이다 그때 그대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이 세상 역시 그대의 것이 아니다. 그때 공포가, 고뇌가 그것의 당연한 결과로 생겨난다.
이 우주에서 버림받은 자는 당연히 공포와 고뇌를 갖게 될것이다.
그이 삶 전체가 투쟁과 갈등의 연속이다. 반드시 실패하게끔 운명지어진 투쟁 말이다.
인간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전체를 대항해서 싸우는 부분은 반드시 패배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존재계와 대항해서 이길 수 없다. 존재계에 따를 수는 있지만 대항할 수 없다.
대항하는 순간 패배하는 것이다. 종교적인 사람이건 비종교적인 사람이건 그것은 누구나 마찬가지다.
단 존재계에 대항하는 사람은 비종교적인 사람이고, 반대로 종교적인 사람은 존재계에 순응하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종교적인 사람은 편안함을 느낄 것이다. 그는 내버려졌다는 느낌을 받지 않을
것이다. 그는 본래부터 이 세계에서 자라났다고 느낄 것이다.
내버려진 것과 자라났다는 말의 차이점을 인식하라.
싸르트르의 '내버려졌다'라는 말은 결국 그대가 속해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것은 그대의 뜻과 아무런 상관없이 강제로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그대는 스스로의 뜻에 의해
태어난 것이 아니다. 그대는 자신이 왜 태어났는지, 그리고 왜 이 삶을 계속해야 하는 모른다.
그래서 이 세상은 그대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며, 그 결과 그대는 풀 수 없는 고뇌를 짊어지게 되었다.
만약 그대가 이 세상의 한 부분이며 없어서는 안될 존재로 자라나게 되었다면 그것은 좋은 일이다.
인간이라고 부르는 특별한 차원으로 우주에 의해 그대가 양육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정말 기분좋은 일이다.
그리고 우주는 다중 차원으로 성장하고 있다. 나무의 차원에서, 산의 차원에서, 별들의 차원에서,
은하계의 차원에서 말이다. 인간 역시 성장하는 하나의 차원이다. 우주는 수많은 차원들을 통해
스스로를 깨닫고 있다. 인간 역시 하나의 봉우리를 이루며 성장하고 있는 차원이다.
나무는 자신의 뿌리를 알지 못한다. 동물 역시 근원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들에게 고뇌가 없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그대가 자신의 뿌리를, 자신의 중심을 자각하지
못한다면 그대는 자신의 죽음도 알 수 없다. 죽음이란 오직 인간을 위한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뿌리를, 자신의 전체성을, 이 우주 속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대가 중심을 자각하지 못하고 산다면, 하나의 아웃사이더로서 산다면 거기에 고뇌가
싹트기 시작한다. 반면에 그대가 주인공이며 우주의 일부이며 존재계 자체의 잠재력을 실현시키는
꽃이라는 사실을 느낄 수 있다면, 존재계가 그대를 통해 자체를 인식할 수 있다는 사실을 느낀다면,
그대는 지복감을 느낄 것이다. 지복감은 우주와 그대가 유기적인 합일체라는 사실에 대한 당연한
결과로 찾아온다. 그러나 그대가 중심을 알지 못한다면 그대는 싸르트르처럼 '내버려졌다'는
감정을 갖게 될 것이다. 생명이 억지로 그대를 살게 한다는 느낌 말이다. 그러나 이 중심이
거기에 있지만 사람들은 인식하지 못한다. 그래서 이제부터 우리는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를
통해 이 중심에 이르는 방편들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첫째로 인간이 태어날 때 그는 특정한 한 점에 뿌리를 박는다.
그 특정한 점을 '차크라' 라고 부른다. 그것은 단전에 있다. 일본에서는 무사들이 자살을 할 때
이 단전에 비수를 박았다. 그들은 중심이 거기에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모두
그것을 잊어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중심을 잃고 헤매는 것이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어린아이가 태어날 때 그는 단전을 통해서 산다. 아이들이 숨을 쉴 때 아랫배를 자세히 보라.
그는 아랫배로 숨을 쉬고 있다. 가슴도 아니고 머리도 아니다. 하지만 자라면서 점점 그곳에서
멀어진다. 아이는 이제 자라서 또 다른 중심을 개발한다. 그것은 바로 기습이다.
감정의 차크라이다. 그는 사랑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러면 가슴의 차크라가 개발될 것이다.
하지만 이 차크라는 진짜 중심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부산물이다. 그래서 어렸을 때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자라서도 결코 사랑을 할 수 없다고 심리학자들이 주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어린아이가 사랑이나 따뜻한 온정 속에서 자라지 못하면 그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의 가슴 차크라가 개발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엄마의 사랑, 아버지의 사랑, 가족,
사회, 이 모두는 아이의 가슴 차크라를 개발시키도록 돕는다. 그리하여 두 아이에게는 드디어 가슴
차크라가 개발된다. 하지만 이것은 제2차 산물이다. 그대가 태어나면서부터 그것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그래서 그것이 개발되도록 도와주지 않으면 그것은 생겨나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가슴의 차크라가 개발되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사람들이 가슴의 차크라가 개발되지
않은 채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사랑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하며 자신이 사랑하고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들은 그 차크라가 없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이 진짜로 사랑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어머니의 사랑을 받기란 쉽지 않다.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것 역시 매우 드물다.
모든 아버지, 모든 어머니들은 자신들이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랑은 매우 어렵게 얻어지는 성숙이다. 그러나 만약 아이가 사랑을 받지 못했다면
그는 결포 스스로 사랑할 수 없다.
인간 사회에 그토록 사랑이 메말라 있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그대는 계속 어린아이를 만들어 낸다. 하지만 그에게 사랑의 차크라를 열어 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이 사회가 더 문명화될 수록 사랑의 차크라보다는 머리의 차크라, 지적인 중심을 더 강조한다.
단전은 근본 차크라이다. 아기는 태어나면서부터 그것을 갖고 있다. 그것은 부차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다.
그것이 없이는 생명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두번째 차크라가 생긴다. 그것은 부차적인 것으로서 사랑을
통해 개발된다. 사랑을 받고 그것에 대응할 때 그 차크라는 점점 성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번째
차크라는 지적인 차크라로서 그것은 머리에 생겨난다. 모든 논리와 모든 교육이 그 차크라에 의해서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 역시 부차적인 차크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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