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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탄트라 - 탄트라의 세계 2

by 심신건강 2025.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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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것은 이 세상에서 찾아보기 드문 것이다.  파르바티는 시바의 무릎 위에 앉아서 묻고 있고

시바는 대답한다.  이것은 사랑의 대화이다.  거기에는 어떤 갈등도 없다.

시바는 마치 자기 자신에게 말하는 것과 같다.  왜 사랑의 언어에 대해서 이토록 강조하는가?

그대가 스승과 사랑에 빠진다면 그때 모든 행동 양식이 변화된다.  그때 이미 그대는 귀를 통해

스승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스승을 마셔 버리는 것이다.  그때 그의 말은 상관이 없다.

말 중간에 흐르는 침묵이 오히려 더 중요해진다.  그가 말하고 있는 것에 의미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 그의 몸놀림, 그의 자비와 사랑은 하나라도 놓칠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탄트라가 고집하는 구조이다.  모든 구절들이 데비가 묻고 시바가 대답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그대의 닫힘은 부서져 나가야 한다.  그때 스승은 약간 공격적으로 보일 것이다.

하지만 그대의 편견과 선입관은 부서져야 한다.  그대가 과거를 완전하게 씻어내 버리지 않는 한 

그 어떤 것도 그대에게 주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시바의 동반자인 데비의 자세가 아니다.

데비에게는 어떤 과거도 없다.  그녀는 더 이상 과거에 지배받지 않는다는 뜻이다.

기억하라.    그대가 사랑에 깊이 빠질 때 그대의 마음은 정지한다.

거기에는 과거가 없다.  오직 현재의 순간만이 남는다.  그것이 전부이다.  그대가 사랑에 빠지는 것은

현재이며 유일한 시간이다.   지금이 전부이다.   거기에 과거나 미래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데비는 그저 열려 있을 뿐이다.   거기에는 어떤 방어막도 없다.  이제 청소되거나 파괴되어야 할

그루터기가 남지 않았다.  밭은 준비가 끝났다.  씨만 떨어지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씨앗을 받아들여

품고 싹이 트게 할 것이다.

우리가 지금부터 이야기할 모든 말들은 수천 년 전부터 전해져 왔던 것에 대한 것이다.  그것들은 시바에

의해 주어진 메시지로서 베다와 바이블과 코란의 가치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다.  탄트라 각각의 문장들은

위대한 경전의 기초가 될 수 있다.  보통 경전들은 교리적인 의미를 품고 있다.  그대는 그것을 토론하고

보호하거나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어떤 토론도 있을 수 없다. 

오직 사랑의 문장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번째로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 라는 말은 직역하면 '의식을 초월하는 방편'이다.

비그야나 는 의식을 의미하며 바이라바 는 의식을 넘어선 상태를 뜻한다.

그리고 탄트라 라는 말은 방편, 테크닉을 의미한다.  따라서 의식을 초월하는 방편 은 가르침 중에서도

최상의 가르침이다.  이것보다 더 고차원적 가르침은 없다.  우리는 무의식적이다.  그래서 모든 종교의

가르침은 무의식을 어떻게 초월할 수 있느냐  어떻게 의식적으로 될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크리슈나무르티의 강의, 선사들의 방편, 그것들은 모두 어떻게 하면 좀더 인간이 의식적으로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에 모든 관심을 쏟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좀더 깨어있을 수 있는가?  좀더 의식 쪽으로 옮겨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관건이다.   그러나 탄트라는 이것을 하나의 이중성이라고 말한다.  의식과 무의식의 이중성이라고 말한다.

만약 그대가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옮겨간다면 그것은 한 극에서 다른 극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둘 다를 모두 넘어가라.  그대가 양극을 모두 초월하지 않는 한 결코 궁극에 이를 수 없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도 되지말고 의식으로도 만족하지 말라.   초월하라.  존재하라.  의식적으로도 되지말고

무의식적으로도 되지 말라.  이것은 모든 종교의 가르침을 뛰어넘는 것이다.   그리고 선과 요가마저도

뛰어넘는다. 

 

비그야나 는 의식을 의미하는 보통 말이지만  바이라바 는 특별한 용어이다.  그것은 탄트라에서만 사용하는

용어로서 초월한 사람에게 쓰는말이다.  그래서 시바는 바이라바로 데비는 바이라비 로 알려져 있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이중성을 뛰어넘는 자들이다.

우리의 경험으로는 오직 사랑만이 초월에 대한 일별을 보여줄 수 있다.  그 때문에 탄트라 지혜의 기본

방편이 사랑이 되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만이 모든 이중성을 초월한다고 말할 수 있다.

두 사람이 사랑에 빠졌을 때, 그들이 깊이 들어갈수록 하나가 된다.

겉으로 나타나는 모습은 둘이지만 내면으로 들어가 보면 그들은 이미 하나가 되어 있다.  이중성이 초월된 것이다.

오직 이런 뜻에서 예수가  신은 사랑이다 라고 한 말이 의미가 있다.   다른 의미로는 그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  우리의 경험상 사랑은 신에게 가장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신이 사랑을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기독교에서는 신이 우리에게 아버지와 같은 사랑을 베푼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히 넌센스이다.   신은 사람이다. 란 말은 탄트라의 문구이다.

그것은 신 혹은 신성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실체가 사랑임을 의미한다. 

왜인가?  사랑 속에서는 하나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육체는 두 가지로 나뉘어지지만 육체를

초월한 어떤 것이 하나를 이루게 된다.

사람들이 그토록 섹스를 갈망하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진정한 갈망은 섹스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됨에 있다.  섹스를 통해서 두 개의 육체가 하나가 되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하나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일시적으로 결합된 것일 뿐이다.

단 한순간 동안만 그들은 두 개의 육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신체적인 합일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런 갈망이 나쁜 것은 아니다.   단지 거기에서 멈추어 버린다면 위험한 것이다.

이 갈망은 하나됨을 원하는 더 깊은 목마름이 숨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랑 속에서는 서로가 내면으로 녹아 들어간다.   거기에 하나됨의 느낌이 존재한다.

그때 이중성은 용해되고 만다.  이중성을 뛰어넘은 사랑 속에서만이 우리는 바이라바의 상태가

무엇인지를 얼핏 볼 수 있다.   우리가 말하는 바이라바의 경지는 되돌아옴이 없는 절대적이 사랑이다.

사라의 정점에서는 떨어지는 법이 없다.  그 정점에 계속 머무름만이 있다.

우리가 시바가 카일라쉬 산에서 머무르도록 만들었다.   그것은 하나의 상징이다.

카일라쉬 산은 가장 높은 정점, 가장 거룩한 정점을 말한다.   우리는 그것을 시바의 거처로 만들었다.

우리는 거기에 갈 수 있다.   그러나 다시 내려와야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거처가 될 수 없다.

우리는 순례 여행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이 티르트라,  순례라는 말이다.

사랑속에서 이 성스러운 순례 여행이 일어난다.  그러나 거의 모두가 성의 울타리를 넘어가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골짜기, 어두운 골짜기에 살고 있다  때때로 어떤 사람이 사랑의 정점에까지 이른다.

그러나 그는 곧 떨어지고 만다.  그곳은 너무 현란하고 휘황찬란하기 때문이다.  그곳은 너무 높고

그대는 너무 낮다.  거기에서 계속 산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사랑을 해본 사람들은 사랑속에서

계속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고 있다.  하지만 하나됨은 계속 이루어져햐 한다.

그것은 시바의 거처이며 집이다.

바이라바는 사랑 속에 산다.  그것은 그의 거처이다.  내가 그의 거처라고 이야기할 때에 그는 사랑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왜냐하면 만약 그대가 카일라쉬 산 꼭대기에서 산다면 그대는

거기가 카일라쉬라는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카일라쉬의 꼭대기에서는 카일라쉬 봉우리가 보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사랑의 정점에서는 

사랑이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시바는 사랑을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는 사랑을 인식한다. 

우리는 사랑 밖에서 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을 느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시바는 사랑 자체이다.

바이라바의 경지는 그가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 자체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는 정점에서 살고 있다.  이제 봉우리는 그의 거처가 되었다.

그러면 이 정점에 어떻게 도달할 수 있을까?  어떻게 이중성을 넘어서, 무의식을 넘어서, 

의식을 넘어서,  육체와 영혼을 넘어서,  이 세상과 모크샤를 넘어서, 여기와 저기를 넘어선 곳에 

이를 수 있을까?  그 방편이 바로 탄타라이다.  탄트라는 순수한 방편 그 자체이다.

그래서 그것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따라서 우리는 데비가 가진 의문부터 먼저 이해해야 할 것이다.

 

데비가 묻는다

오! 시바여,  당신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왜 이런 질문을 하는가?  그대 역시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의미를 갖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왜 데비가 그렇게 묻는지를 이해하려고 하라.

당신의 실체는 무엇인가?

데비는 사랑 속에 깊이 빠져 있다.   그대가 사랑에 깊이 빠져을 때 처음으로 그대는 내면의 실체와

대면한다.  그때 시바는 형상이 아니다.  그때 시바는 육체도 아니다.  그대가 사랑 속에 있을 때

사랑하는 이의 육체는 사라진다.   형상은 사라지고 형상 없는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대는 심연을 대하고 있다.   우리가 사랑을 그토록 두려워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의 육체를 대면할 때,  얼굴과 얼굴을 마주 대할 때 우리는 어떤 두려움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심연을 대할 때 두려움을 느낀다.

만약 그대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진정이라면 그때의 육체는 사라지고 말 것이다.

절저의 순간 형상은 용해되고 만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서 형상 없음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것은 끝없는 심연으로 떨어지는 것과 같다.   그래서 이 질문은 단순한 호기심에서

나온것이 아니다.   데비는 처음에 형상과 사랑에 빠진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그렇게 시작된다.

그녀는 시바를 한 남자로 사랑했다.   이제 그 사랑이 성숙되었을  때 그 남자는 사라져 버렸다.

그는 형상이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다.  이제 어디에서도 그를 발견할 수 없다. 

동시에 모든 곳에서 발견된다.

 

오, 시바여 당신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이 물음은 가장 강렬한 사라의 순간에 터져나오는 것이다.  대개 마음의 상태에 따라서 물음의

종류는 수없이 많다.  그러므로 그대의 마음에 한 가지 물음을 창조하라.  데비는 시바가 사라졌을 때

당황했을지도 모른다.   사랑이 정점에 다다랐을 때  사랑하는 사람은 사라지고 만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그러나 항상 이런 일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형상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대는 육체가 아니다.  그대는 육체로써 움지기고 육체로써 살아간다.

하지만 육체가 그대는 아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외부에서 바라볼 때 그는 하나의 육체로 보인다.

그의 내면을 꿰뚫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은 내면을 관통한다.   그때 더 이상 우리는 외부적인

시각으로 사람을 바라보지 않는다.   내면의 시각으로 사람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그때 형상은 사라진다.   

임제 선사가 깨달음을 얻었을 때 그의 첫번째 행동은 자신의 몸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는 것이었다.

내 몸이 도대체 어디로 갔는가?    그는 찾기 시작했다.   그는 제자를 불러서 이렇게 말했다.

가서 내 몸이 어디에 있는지 좀 찾아오너라.   나는 내몸을 잃어버렸다.

 

그는 형상 없음 속으로 들어갔다.  그대 역시 또 하나의 형상 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그대는 자신을 

직접 알지 못한다.  다른 사람의 시선을 통해서 그대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대는 거울을

통해서만이 자신을 알 수 있다.  눈을 감고 생각해 보라.  거울이 없다면 어떻게 그대는 자신의 얼굴을

알겠는가?   만약 거울이 없다면 얼굴도 없다.  거울이 그대에게 얼굴을 주었다.   거울이 없는 

세상을 한번 상상해 보라.  그러면 그대는 홀로 남게 된다.  전혀 거울이 없고 거울처럼 작용하는 다른 사람의 

시선도 없다.  그대가 무인도에 홀로 있다면 그 어떤 것도 그대에게 거울 역할을 할 수 없다.

그렇다면 그대에게는 얼굴이나 육체가 있을 수 없다.  사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만이 

우리 자신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우리의 외형만을 알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외형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한다.

또 다른 선의 스승이 회혜 선사는 그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네가 명상 속에서 너의 머리를 잃어버릴 때 그 즉시 나에게 오라.  그때 너는 두려워하지 마라.

그때가 너의 수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때이다.  그때가 되어야 드디어 너는 진정으로 

배울 수 있게 된다.

 

머리를 갖고서는 어떤 가르침도 받아들이는 것이 불가능하다.

오직 사랑 속에서만이 그대는 다른 사라므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 자신이 되어서 말이다.    그리하여 그대는 그와 하나가 된다.

처음으로그대는 존재의 심연을 알게 된것이다.  그것이 바로 형상없는 현존인 것이다.

그래서 처음 수세기 동안에는 시바에 대한 어떤 초상화나 조각상도 조성하지 않았다.

단지 시바링가  라는 상징물만 만들었을 뿐이다.  시바링가란  단지 빛나는 현존, 빛의 오라일 뿐이다.

그대가 어떤 사람을 사랑할 때, 그대가 어떤 사람 속으로 들어갈 때 그는 육체가 아니다.

빛나는 현존이 되는 것이다.

 

이러 이유에서 데비는 당신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이토록 경이로 가득 찬 우주는 무엇입니까?

라고 물은 것이다.    우리는 우주라는 개념을 알고 있다.   그러나 경이로 가득 찬 우주는 결코 

알지 못한다.  그 우주는어린아이들만이 안다.   연인도 안다.  때때로 시인과 미친 사람도 안다.

그러나 그대는 모른다.  이 세계가 놀라움으로 가득 차 이싸움을 그대는 알지 못한다.

그대에게는 모든 것이 그저 무미건조할 뿐이다.   그대로 하여금 춤추고 노래부르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대의 내면에는 어떤 시도 솟아나지 않는다.   우주 전체가 완전히 기계적으로

보일 뿐이다.   그러나 어린아이들의 눈에는 우주가 경이롭게 보인다.

그대가 사랑에 빠졌을 때 그대는 다시 한번 어린아이로 되돌아간다.  예수는 오직 어린아이 같은

자만이 신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라고 말했다.  왜인가?

우주가 경이롭지 않다면 그대는 종교적으로 될 수가 없다.   우주가 그대에게 설명되어질 수 있는 것이

라면 그대의 기질은 과학적이다.   우주가 어떠하든 간에 그것을 안다고 생각하는 자에게는 아무런 경이나 

신비가 없다.  그러나 그대의 누이 경이로움으로 가득 찰 때 이 우주는 하나의 신비와 미지의 것으로

나타난다.

데비는 물었다.

"이토록 경이로움으로 가득 찬 우주는 무엇입니까?"

그녀의 질문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갑자기 범개인적 차원으로 뛰어올랐다.  처음에는 

'당신의 실체가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는데 갑자기 질문의 차원이 바뀐 것이다.

형상이 사라질 때, 사랑하는 사람이 우주, 형상 없음.  무한이 될 때, 갑자기 데비는 자신이 시바에

대해서 질문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달은 것이다.  그녀는 우주 전체에 대한 질문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시바는 우주 전체가 되었다.  모든 별들이 그 속에서 돌고 있다.

모든 공간이 그에 의해 둘러쳐져 있는 것이다.  이제 그는 거대한 울타리가 되었다. 

칼 야스퍼스가  신은 거대한 울타리  라고 정의했듯이 말이다.

그대가 사랑으로 들어갈 때 육체는 사라지고 따라서 개체 역시 사라진다.  사랑은 우주로 들어가는 

문이 되었다.   그대의 호기심은 과학적인 것이 될 수 있다.  그때 그대는 논리를 통해 접근해야 한다.

그때 그대는 형상없음에 대한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  오직 형상에 매달리고 거기에만 집착해야 한다.

그래서 과학은 항상 형상에만 관심을 갖는다.  결국 과학은 최초의 형상 이상의 것은 정의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다.   사랑에서는 형상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아직 끝이 아니다.  형상을 용해시켜 버려라.

형상이 사라질 때,  어떤 경계도 없을 때 모든 것은 서로 다른 것 속으로 녹아든다.   그리하여 거대한

하나를 이룬다.   우주 전체가 커다란 하나이다.  그때 비로소 우주는 경이로 가득 차게 된다.

 

이 모든 원소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습니까?

데비는  계속 묻는다.

이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원소의 기원은 무엇입니까?  우주의 바퀴 중심축에 누가 앉아 있습니까?

이 바퀴는 끊임없이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 이 바퀴의 중심에 앉겠는가?   그 축이 어디에

있는가?  움직이지 않는 중심축 말이다.

데비는 대답을 듣기 위해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그 누구에게도 묻지 않고 자신에게

묻듯이 계속 중얼거린다.

 

형상들로 충만하며 동시에 모든 형상들을 초월한 이 생명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우리는 시간과 공간,  이름과 모양마저도 뛰어넘어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나의 모든 의심을 없애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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