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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탄트라 - 탄트라의 세계 3

by 심신건강 2025.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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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그대가 지적인 질문을 한다면 그 문제를 풀어주는 모범 답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데비는 단지 자신의 의심을 모두 없애 달라고 말하고 있다.

지적인 물음은 하나의 의문을 풀 때 하나 이상의 또 다른 의문들이 생겨난다.

어떤 답안을 주더라도 의심은 거기에 여전히 남아 있다.  이 점을 명심하라.  의심하는 마음은

언제나 의심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무슨 대답이 떨어지건 그런 것은 상관이 없다.  그대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이 세상은 누가 창조했는가?

그러면 내가 갑이 창조했다 고 말한다.  그러면 그대는 갑은 누가 창조했는가?  하고 또 물을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해결책은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해결책은 의심의 근원을 뿌리뽑는 것이다.

모든 것을 믿는 마음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데비는  나의 모든 의심을 없애주소서! 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대가 질문을 던질 때 거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를 갖고 있다.   그리고 이미 해답도 갖고 있다.

단지 그대는 확증이 필요한 것이다.   그대는 자신의 해답이 옳다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이다.

그러면 그 질문은 거짓된 것이다.  질문도 아니다.  그대는 자신을 변화시킬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단지 호기심에서 질문을 던질 뿐이다.

마음은 끊임없이 질문을 만들어 낸다.  마치 나무에서 낙엽이 떨어지듯 마음에서 질문들이 솟아난다.

그것이 마음의 본성이다.  그대가 무슨 질문을 하고 있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무조건 질문을

만들어낼 뿐이다.   이것이 철학의 모든 역사이다.

버틀란드 럿셀은 노년에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어렸을 때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내가 모든 철학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자라면 이 모든 의문들이

다 풀릴 것이다"  하지만 내 나이 80세가 된 지금 그 의문들은 하나도 풀리지 않고 그대로 있다.

나는 어렸을 때 철학이란 모든 궁극적인 해답들을 찾기 위한 것이라고 종종 말하곤 했다.  그렇지만 

이제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오히려 철학은 끝없는 질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의 질문은 하나의 해답과 수많은 다른 질문을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의심하는 마음이 문제이다.  파르바티는 말한다.

"나의 질문에 개의치 마세요.   나는 많은 것들을 물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딱 

한 가지뿐입니다.  그것은 나의 의심하는 마음을 없애 달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질문은 그 마음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의심하는 마음이 사라질 수 있겠는가?  무슨 말을 해야 그 문제를 풀 수 있겠는가?

마음이 곧 의심이다.  마음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의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시바는 대답했다.  물론 시바의 방법으로 말이다.  그의 방법은 마음을 사라지게 만드는 테크닉이었다.

그리고 그 테크닉은 가장 오래된 테크닉이었다.  그리고 그 테크닉은 가장 오래된 테크닉이다.

또한 112가지 방편의 완벽한 세트를 갖추고 있다.  그것들은 모든 가능성을 다 갖고 있다.   마음을 없애고,

마음을 초월하는 그 방편에는 어느 한 가지도 덧붙이거나 뺄 것이 없다.  그리고 이 책 비그야나 바이라바 탄트라는

5000년의 나이를 갖고 있다.  이 세상에서 이만큼 오래되고 완벽한 책은 없다.  그래서 이 책은 가장 오래된

동시에 언제나 가장 새로운 것이다.  그 방편들은 지구상에서 인간이 사는 동안에는 영원한 진리인 것이다.

이 112가지의 명상법은 마음을 초월하는 과학으로 구성되어 있다.  우리는 이제  그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먼저 우리는 그것에 대해 지적으로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그대의 지성은 단지 하나의 도구로만 사용하라.

그리고 이들 테크닉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그대의 과거 지식은 한쪽으로 제쳐둬라.

그재가 지금까지 모아왔던 모든 알음알이들은 무엇이든지 제쳐둬라.  그것은 거울 위에 앉은 먼지일 뿐이다.

그리하여 이 방편들을 신선한 마음으로 만나라.  논쟁하려 들지 말라.  그러나 깨어 있어라.  논쟁하는 마음이

깨어 있는 마음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  그대가 논쟁에 들어가는 순간 그대는 깨어 있음을

놓치고 만다.  그대는 더 이상 지금 여기에 있지 않다.

그리고 이 방편들은 어떤 종교에도 속하지 않은 것이다.  이것들은 힌두교의 산물이 아니다.  상대성 원리를

발견한 아인슈타인이 유태인이라고 해서 상대성 원리가 유태교의 것인가?  전기가 기독교의 것인가?

그 누구도 그대에게 '왜 우리의 전기를 사용하는가? 라고 말할 수 없다.  이처럼 과학은 그 어떤 민족이나

종교의 것도 아니다.  그리고 탄트라는 과학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절대로 힌두교의 것이 아니다.

이 가르침은 힌두교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따라서 이 방편에는 어떤 종교의식도 담겨 있지 않다.

어떤 사원도 필요없다.  그대 자신이 바로 사원이 된다.  그대가 실험실이 된다.  모든 실험이 그대 속에서

행해질 것이다.  그리고 어떤 신앙심도 필요 없다.

이것은 종교가 아니라 과학이다.   여기에 신앙은 필요치 않다.  코란이나 베다를 믿을 필요도 없고,

마하비라나 붓다에게 귀의할 필요도 없다.  교회에 다닐 필요도 없고 세례를 받을 필요는 더군다나 없다.

또한 불교도는 불교도로서,  기독교인은 기독교인으로서 이 방편을 이용하면 그만이다.   굳이 다른 

종교로 개종하거나  새로이 믿을 필요가 없다.  그대가 어떤 이념, 어떤 종교에 몸닫고 있더라도 탄트라는

그대에게 개종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다. 탄트라는 종교란 단지 사회적인 일이라고 말한다.

그대 내면의 문제는 탄트라가 관여할 것이다.  그대 존재를 변형시키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탄트라이다.

그대가 믿는 종교의 궁극적인 상태는 오직 탄트라의 방편을 통해서만이 얻을 수 있다.

신앙심이나 교리를 통해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대가 이 테크닉들을 수련하더라도 

그대에게 어떤 사회적 변화도 필요치 않다.

 

탄트라는 항상 그대를 도울 수 있다.  그대가 어떤 옷을 입고 있던지 말이다.

탄트라는 순수과학이다.  그대가 아플 때 병원에 가면 주사를 맞기 전에 몇 가지 마이신 반응검사를 한다.

그때 기독교를 믿는다고 해서 반응검사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불교도들에게만 특별한 증상이 

나타나는 일도 없다.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다.  그대의 신념체계가 무엇이든지, 그대가 사회주의자이건 자본주의이건

마이신 반응검사의 유형은 항상 똑같다.

그대는 무지하다.   아직도 그대는 갈등 속에 있다.  그대는 잠들어 있다.  이것이 바로 병이다.

영혼의 병인 것이다.  이 병은 오직 탄트라에 이해서만 고쳐질 수 있다.  그대가 무엇을 믿든 그것은

상관없다.  그대는 오직 탄트라를 통해서만이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  거듭나는 것은 마음이나 믿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실제적 현상이다.  그래서 그것은 과학이다.  그래서 그대의 종교가

무엇이든지 그대가 변하되고 싶다면 과학적 방법을 사용하라.  탄트라의  방편을 이용하라.

탄트라는 그대에게 헌금이나 신앙심, 혹은 순교 따위를 요구하지 않는다.

어쨌든 지금까지 탄트라는 이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알려져도 그것은 완전히 왜곡되어 알려졌다.

그리고 거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탄트라는 매우 순수하고 고차원적이 과학이다.

일반 대중들이 그것을 이해하기란 극히 힘들다.   우리는 상대성 이론의 이름만 들었을 뿐  그것이

어떤 내용인지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다.    아인슈타인이 살아 있을 때 전세계에서 그의 이론을 

이해하는 사람은 단 12명뿐이었다.  아인슈타인조차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키기란 무척

힘든 일어었다.    단지 논리적으로 이해하는 데도 그러한데  탄트라는 더 힘든 것이다.  

그것은 변형이 뒤따라야만이 완전한 이해가 가능하다.  논리만 갖고서는 부족하다.,

따라서 탄트라를 통해서 변형되지 않은 사람은 그것의 전달이 불가능하게 된다.

그런 이유 때문에 탄트라는 대중들에게 전파될 수 없었다.  그대가 어떤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적어도 그것을 오해하게 된다.    그냥 진공인 채로 남아 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대가 어떤 일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대는 그것을 비난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그대는 모욕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때 그대는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니?  참을 수 없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분명히 자체적으로

결함을 갖고 있을 것이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은 비난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완전히 넌센스이다' 라고 말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말해야만 사람들은 비로소 

안심하게 된다.   그래서 탄트라는 그처럼 긴긴 세월 동안에도 대중들에게 전파되지 않았다.

탄트라는 세상에 나오는 즉시 오해되고 왜곡되었다.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하고 모두 현자로 변할

것을 두려워한 성직자,  종교지도자들이 탄트라를 왜곡시키는 데 가장 앞장섰다.

사실 탄트라는 모든 이중성을 뛰어넘고 있다.    그것의 관점은 완전히 무도덕적이다.

무도덕이란 말은 도덕적인 것도 비도덕도 아니라는 뜻이다.  우리는 어떤 철학이나  사상에

대해서 도덕적이거나 아니면 비도덕적이라고 판단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를 뛰어넘어 

무도덕적인 것은 판단하기에 매우 어렵다.

탄트라는 무더덕이다.   이런 식으로 세상을 한번 바라보라.   의학은 무도덕이다.

그것은 도덕적인 것도 비도덕적인 것도 아니다.  만약 그대가 도둑에게 약을 주어도 그 약은 들을 것이며

성자에게 주어도 마찬가지다.  약은 나는 그가 도둑이므로 그를 죽게 할 것이고,  성자이므로 그를

살릴 것이다  라고 말하지 않는다.  의학은 과학적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대의 존재 역시 도둑도

아니고 성자도 아니다.  탄트라는 그런 것에 관심을 갖지 않는다.

탄트라를 수행하기 위해서 도덕성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탄트라를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다.  탄트라는 그런 사람을 보면 웃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열이 나서 병원에 갔다.

그런데 의사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면 이상하지 않겠는가?

 

"지금은 안된다.  먼저 열을 내리고 오라.  먼저 건강해진 다음에 오라.  그러면 약을 주겠다."

이것은 다음의 이야기와 같다.  어떤 도둑이 성자에게 가서 말했다.

"저는 도둑입니다.   나에게 명상하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자 성자가 말했다.

먼저 너의 직업을 바꾸어라.  그리고 난 뒤에 명상법을 일러주겠다.

또한 알콜 중독증 환자가 와서 말했다.

나는 알콜 중독증 환자입니다.  명상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자 성자는 또 이렇게 대답했다.

먼저 술을 끊어라.   그리고 나서 명상을 배워라.

 

그러나 이런 조건을 제시한다는 것은 불가능을 말하는 것과 같다.  알콜 중독증 환자나 도둑이나 

부도덕한 사람들은 병든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현상들은 병든 마음에서 생긴 결과일 뿐이다.

그리고 병든 마음을 고치기 위한 치료약이 바로 명상이다.

그런데도 먼저 병든 마음을 고친 후에야 명상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도대체 무엇을 위한 명상인가?

탄트라는 무도덕이다.  탄트라는 그대가 누구인지를 묻지 않는다.  한 사람으로서 그대의

존재면 충분하다.   그대가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탄트라는 상관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대에게 맞는 테크닉을 선택하라.   그리고 그대의 전 에너지를 거기에 쏟아부어라.

진정하고 참된 방편을 그대에게 어떤 선결 조건도 내세우지 않는다.

만약 어떤 방편이 그대에게 조건을 제시한다면 그것은 가짜라고 생각해도 된다.

도둑에게 도둑질을 고쳐야 명상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에게는 명상이 불가능할 것이다.

욕심 있는 사람이 욕심의 대상을 바꿀 수는 있다.    그러나 완전히 욕심을 버릴 수는 없다.

그대가 강요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대는 대체 효과를 내는 다른 것을

말해주어야 한다.   천국이라든지 모크샤라든지  사치타난다 라든지 하는 것을 말이다.

그것들은 모두 욕심의 대상일 뿐이다.

탄트라는 그에게 진정한 방편을 주지 않는 한 결코 그를 변화시킬 수 없다고 말한다.

설교를 통해서는 어떤 것도 변화될 수 없다.  그리고 그대가 이 세상을 둘러보면 탄트라가 

말하는 것들이  여기 저기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너무 많은 

군더더기들이 붙어 있다.   수많은 설교가들이,  종교지도자,  도덕군자들이  거기에 쓸데없는

사족을 너무 많이 붙였다.  그리하여 모든 것을 오염시켜 놓았다.  그들의 눈으로 보면 이 세상은

더러운 것,  불결한 것 투성이인 것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가?   그대가 그들을 정신병원에 데려다 놓아도 그들은 설교를 계속한다.

"당신은 틀렸다.  당신은 죄인이다.  당신은 마음에 많은 병을 갖고 있다.  그 병을 고쳐라"

 

그들은 이 세상을 정신병원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을 향해 설교를 멈추지 않는다.

화내지 마라

하지만 그들이 제시하는 방편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면 그 말을 듣는 그대는 이렇게 반문한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  나는 지금 화가 머리 끝까지 난 상태이다.  그런데 단지 '화내지 마라' 라고

말하는가?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화를 억누르려고 하면 할수록 화는 더 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죄의식까지 수반된다.

그대가 화를 내지 않으려고 시도하지만 반드시 실패한다.  결국 그대는 열등감과 죄의식을 갖게 된다.

사실 분노와 대항해서 싸운다면 절대로 분노를 이길 수 없다.  욕망도 마찬가지이다.  

그대가 자신과 싸워서 이겨본 적이 있는가?   결국에는 지기 마련이다.  거기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메커니즘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대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려면 특별한 무기를 가져야 한다.

특별한 방편을 말이다.  그 방편은 그대의 마음을 바꾸는 것이다.  분노란 그대의 혼란된 마음에서 

피어나는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면을 바꿔라  그러면 외부도 변화될 것이다.

그래서 탄트라는 소위 그대의 도덕성이라는 것에 관여하지 않는다.   도덕성을 강조하는 것은

인간이 되지 말라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분노도 버리고 성욕도 버리고 이것도 저것도 모두 하지말라'

라고 말한다면 이미 그는 인간이 아니다.   결국 그런 말을 계속 듣게 되면 사람은 열등감과 죄의식에

사로잡히고 만다.  불가능한 것을 시도하면 실패할 수 밖에 없고 결국 자신이 죄인이라는 확신만 더욱

커진다.   그래서 설교자들은 그대가 죄인이라는 말을 온 세상에다 증명시킨다.  그래야만이 그들은

그 직업을 계속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죄인이어야만 한다.  그래야 교회나 사원이나

모스크가 계속 번창할 것이다.   그대의 죄는 그들의 밥줄이며 그대의 죄가 깊어질수록

그들의 교회는 높이 올라간다.  그들의 번영은 그대의 죄 위에,  그대의 열등감 위에 세워져 있다.

그러나 탄트라는 그대의 도덕성이나 사회적 지위를 묻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탄트라가 

비도덕적이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탄트라는 그대의 마음 자체를 변형시키는 과학적 방편이다.  그리고 마음이 변형되면 그대 역시

달라질 것이다.   뿌리가 바뀌면 가지도 바뀌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성직자와 종교지도자들은

탄트라의 가르침이 전파될까봐 두려워 한다.   그들은 종교와 도덕이라는 미명으로 탄트라를

왜곡시켰다.

기독교의 역사를 보라.    기독교는 과학의 발전에 계속 반대해왔다.   한번 그대가 자연의 비밀을

알고 나면 더 이상 종교적인 설명으로는 먹혀들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물질을 변화시키는

비밀을 알고 나면 조만간에 마음에 대한 변화의 비밀도 알아내고 만다.

마음 역시 미묘한 물질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탄트라의 기본 전제이다.   마음은 미묘한 물질이다.  그래서 그것은 변화될 수 있다.

한번 그대가 변화된 마음을 갖게 되면 그대는 다른 세계를 접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음을

통해서 세상을 보기 때문이다.  그대에게 보이는 세상은 그대의 특수한 마음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마음을 바꾸어라.   그러면 세상 역시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만약 마음이

없어진다면 그것은 탄트라의 궁극적 경지이다.  탄트라가 궁극적으로 피하는 것은 그대의

마음을 없애는 것이다.  그때  그대는 드디어 중재자 없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중재자가 사라질 때 비로소 그대는 실체와 직접 조우할 수 있다.   이제 그대와 실체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탄트라는 말한다.   마음이 사라진 상태를 바이라바의 경지라고 말이다.

그것은 바로 무심의 상태이다.  처음으로 그대는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직접 보게 된것이다.

만일 그대가 마음을 갖고 있다면 마음은 그대 앞에서 세상을 창조해 나갈 것이다.

그때 눈앞에 펼쳐지는 세상은 그대 마음의 투시체이다.  그러므로 먼저 마음을 바꾸어라.

그대의 마음을 무심으로 바꾸어라.   그러면 이 112가지 방편들이 그대를 도와줄 것이다.

물론 그 방편 모두가 그대를 도와줄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물론, 그 방편 모두가 그대를

도와줄 것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 112가지로써 충분하다.

이 안에 다 들어 있다.   그러나 그대에게 맞는 것을 고르면 된다.   그리고 고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우리는 각각의 방편들을 하나씩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맞는 방펴을 고르라.

우선 지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물론 그것이 다는 아니다.  내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해보라.

어떤 방편이 그대에게 적합한 것이라면 그것은 마치 조립품처럼 즉시 그대에게 잘 맞을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애매 모호함도 없다.   그대는 확실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이 방편들을 하나씩 실험해 보라.   그러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대에게 맞는 한가지

방편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내가 놀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대가 너무 심각하게 그것을 대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단지 놀이하라.  그러면 어떤 것이 그대에게 딱 들어맞을 것이다.

그때 심각해져라.  그 속으로 깊이 들어가라.  강렬하게,  진지하게,  그대의 전 에너지를

쏟아부어라.  그러기 전에는 단지 놀이처럼 가볍게 다루라.

한 가지 방편에 대해서 적어도 사흘씩은 해봐야 한다.  만약 그것이 부적합하다는 확신이

들면 다른 것으로 옮겨가라.  그리하여 그대의 방편을 찾게 될 때 다른 방편들은 모두 잊어버려라.

그리고 한 가지 방편에만 매달려서 삼 개월은 꾸준히 해야 한다.  그러면 기적이 일어날 것이다.

그대에게 맞지 않는 방편은 아무리 해봐도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맞는 방편은 

단 삼 분이면 금방 알 수 있다.

그래서 이 112가지 방편은 그대에게 기적적인 체험을 가져다 줄수 있다.  그러니 내 말을 

주의깊게 들어보라.  체험을 얻는 것은 그대에게 달려 있다.   나는 가능한 여러 각도에서 

그것들을 설명할 것이다.  그대에게 맞지 않다고 느끼는 것은 사흘 정도 그것을 실험해 보라.

그리고 잊어버려라.  그대에게 맞는 것이 나타나면 그것을 삼 개월 동안은 계속하라.

그대의 삶은 기적으로 변할 것이다.  아직 그대가 그 신비를 알지 못했다면 오직 이 탄트라의

방편만이 그대에게 그 신비를 맛보게 해줄 것이다.

시바는 112가지 방편을 제시했다.   이것은 모든 가능한 방법들이다.  만약 여기에서도

그대가 맞는 것을 찾지 못한다면 이제 그대에게 다른 방법은 없다.   이 점을 기억하라.

그리고 수행 따위는 잊어버리고 그저 기쁘게 살아라.   그대는 더 이상 수행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 112가지 방편들은 인류 전체를 위한 것이다.   어떤 것들은 이미 지나간 과거 세대를

위한 것이고 어떤 것들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미래세대를 위한 것이다.

'이 112가지 방편 모두가 나에게 맞지 않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결코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여기에는 인간 마음의 모든 형태들이 다 고려되어 있다.  아직 한번도 사용되어 본 적이 없는

방편도 있다.  그것은 미래 어느때쯤 나타날 인간들을 위한 것이다.   그리고 또한 많은 방편들이

이미 쓸모없는 것도 있다.  그것은 과거의 인류들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걱정하지 마라.

그대에게 맞는 방편은 많이 있다.  그리고 그대가 찾기만 한다면 반드시 찾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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