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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

탄트라 비전 - 탄트라의 세계

by 심신건강 2025.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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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비가 묻는다.

 

오! 시바여. 당신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이토록 경이로 가득 찬 우주는 무엇입니까?

이 모든 원소는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습니까?

우주의 중심에 앉은 자는 누구입니까?

형상들로 충만하며 동시에 모든 형상들을 초월한 이 생명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우리는 시간과 공간,  이름과 모양마저도 뛰어넘어

그 속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까?

나의 모든 의심을 없애 주소서!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우선 살펴볼 것이 몇 가지 있다.  먼저 비그아나 바이라바 탄트라의

세계는 지성적이거나 철학적인 세계가 아니다.   여기에 이론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직 기교와 방법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어떤 도덕이나 원칙 같은 것도 없다.

'탄트라' 라는 말 자체가 방법이나 길이란 뜻이다.

그래서 이것은 철학이 아니다.  이 점을 주시하라.  탄트라는 지적인 문제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것은 사물을 '왜' 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라는 문제로 대한다.   

그것은 '진리가 무엇이냐' 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진리에 이를 수 있느냐'를 

따지는 것이다.

또한 탄트라 라는 말은 테크닉을 의미하며 이런 접근 방식은 과학적인 것이다.   

과학은  '왜' 라는 의문보다는  '어떻게' 라는 의문에 더 관심을 쏟는다.  바로 이 점이 과학과 철학의

기본적인 차이점이다.   철학자는 '이것은 왜 존재하는가?' 라고 묻는다.  그러나 과학자는 이렇게 묻는다.

"이것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그대가 '어떻게' 라고 묻는 순간,  그때는 방법 즉 테크닉이 중요해진다.

그때 탁상 공론은 아무 의미가 없다.  중심이 되는 것은 경험이다.

탄트라는 과학이다.   탄트라는 철학이 아니다.  철학을 이해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거기에는 오직 지능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대가 언어를 이해할 수 있다면,  개념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대는 철학을 이해할 수 있다.

그대는 변화할 필요가 없다.    거기서는 그대의 변형을 요구하지 않는다.

지금 있는 차원에서 그대로 철학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탄트라는  다르다.

탄트라에서는 그대의 변화를,  그대의 차원적 승화를 요구한다.

그대가 달라지지 않는 한 탄트라는 이해되어질 수 없다.   탄트라는 지적이 게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산 체험이다.  그대가 수용적으로 되고, 준비되고, 느낄 만큼 예민해지지 않는 한

그것은 그대에게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철학은 생각만으로, 그대의 두뇌만으로 충분하다.  거기에 그대의 전체성은 요구되지 않는다.

그러나 탄트라는 그대의 전부를 요구한다.    그것은 훨씬 깊은 도전이다.

그대는 그 속에서 전체가 되어야 한다.   탄트라를 알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한다.  그것은 그대의 전 존재를 바치는 길이다.  물론 여기서 데비의 질문은 철학적인 질문이며,

추상적인 것이다.   하지만 탄트라는 데비의 질문에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철학적인 질문 자체가

이미 추상적이며  피상적인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모든 질문은 두 가지 차원으로 구분된다. '철학적이냐 아니면 본질적이냐'  혹은 '지적이냐 아니면

전체적이냐' 하는 것으로 말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사랑이 무엇이냐?' 하고 묻는다고 하자.

그대는 그것을 지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거기에 이론을 덧붙이고 가설을 세울 수 있으며  결론을

이끌어낼 만큼 체계를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그대는 사랑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할 수도 있다.

이론을 세우는 데는 경험이 필요치 않다.   차라리 적게  알수록 더 과감하게 체계와 이론을 세울 수 있다.

오직 장님만이 빛이 무엇인지를 손쉽게 정의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알지 못할 때,

무식할 때 대담해지는 법이다.  앎은 사람을 주저하게 만든다.  그대가 많이 알면 알수록 점점 수렁으로

빠져들어 간다.  많이 알수록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가를 크게 느낀다.  그래서 진짜로 현명한 사람들은

무지로 돌아간다.   그들은 어린아이나 바보처럼 단순해지는 것이다.

철학적으로 되려 한다면,  이론으로 하나의 체계를 세우려 한다면 그대는 적게 알수록 좋다.

그래야 일이 쉽게 된다.  지적인 문제에만 국한시킨다면 문제는 간단하다.   그러나 그것은 존재적인

것은 결코 되지 못한다.

그것은 단지 사색이나 추론을 통해서도 가능하다.  그러나 그대의 존재를 변형시키는 데는 아무런 힘이

없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다.   진실로 사랑을 알기 위해서는 사랑에 빠져야 되는 법이다.

사랑에 대한 이론과 철학을 안다고 해서 그대가 몸소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체험만이 그대를 변화시킬 수 있다.   그대가 사랑에 빠지는 순간 그대는 다른 사람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나올 때는  이미 그대의 옛모습은 사라지고 없다.   

옛날의 그대는 그대가 아니다.    거기에 하나의 틈이 생겼다.  옛사람은 이미 죽었고 새 사람이

나왔다.  이것이 바로 거듭나는 것의 의미이다.

 

탄트라는 철학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데비는 매우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러나 시바는 데비와 같은 방식으로 대답해 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대는 처음부터

이 점을 분명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그대는 처음부터 이 점을 분명하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당황할 것이다.   시바는 데비의 질문에 어떤 해답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데비가 묻는 질문에 시바는 완전히 다른 말을 하고 있다.  사실  이 세상의 모든

질문은 데비의 질문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그런 질문은 끊임없이 그대 속에서 일어나고 있다. 

 

질문의 형식은 다르지만 내용은 데비의 질문 속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 질문에 오직

시바만이 대답할 수 있다.  시바의 차원에 이르지 않는 사람은 그 누구도 진정한 해답을 보여

줄 수 없다.   

 

데비는 '당신의 실체가 무엇입니까?' 라고 묻고 있다.  그러나 시바는 그것에 대해서 대답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한 가지 테크닉을 가르쳐 주고 있다.    만약 데비가 그 테크닉을 통과한다면 

그녀는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그녀 스스로 알게 된 것이다.  진정한 해답은 언제나  질문에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시바는 '내가 누구다'라고 말해 주지 않는다.  

단지 한 가지 방편, 하나의 테크닉을 가르쳐 줄 뿐이다.   그리고 그 테크닉을 수행하면 그대 역시 

해답을 알게 될 것이다.

 

탄트라에서는 행하는 것이 곧 아는 것이다.  그 외에 다른 앎은 없다.   그대가 뭔가를 행하지 않으면,

그대가 변화되지 않으면, 사물을 바라보는 그대의 시각이 달라지지 않으면,  지적인 차원 이상의

차원으로 옮겨가지 못하면,  거기에는 해답이 없다.  물론 여러 가지 그럴싸한 대답들으 주어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거짓말들이다.   모든 철학적 해답들이 그러하다.  그대는 하나의 질문을 던지고

철학은 거기에 맞추어 대답한다.    그러면 하나의 질문을 던지고 철학은 거기에 맞추어 대답한다.

그러면 그대는 만족스럽기도 하고 불만족스럽기도 하다.   만약 그것이 그대를 만족시키면 그대는

그 철학에 빠질 것이다.  하지만 그대는 그 속에서 아무런 변화없이 그대로 남아 있다.

한편으로 그것이 그대를 만족스럽게 하지 못한다면 만족할 만한 철학을 만날 때까지 찾아다닐 것이다.

그러나 그때도 그대는 여전히 변화되지 않는다.  어떤 것에도 감동받지 않고 상처받지도 않는 

상태로 말이다.

 

그대가 힌두교도이건, 불교도이건, 아니면 기독교도이건 그것은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것은 단지 그대를 가리고 있는 가면이며 옷일 뿐이다.   교회나 사원, 혹은 모스크에 가더라도

똑같은 사람이 간다.   단지 가면만 다를 뿐이다.  복장만 다를 뿐이다.  그리고 그 가면과 복장은

모두 가식이며 거짓이다.  그것을 들추어 버리면 똑같은 사람이 나온다.  똑같은 공격성,

똑같은 분노, 폭력,탐욕, 질투 등등,  모든 것이 똑같다.   기독교도의 성이 불교도의 성과 어떻게

다른가?  기독교도의 폭력이 이슬람교도의 폭력과 어떻게 다르단 말인가?  모두 마찬가지다.

사람은 같은데 입고 있는 옷이 다를 뿐이다.

탄틀라는 그대의 옷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탄트라는 옷 속에 감추어진 그대 자신을 바라본다.

만약 그대가 질문을 한다면 그것은 그대가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을 보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빛이란 무엇인가?  철학은 빛에 대해서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빛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은 탄트라의 영역이다.

빛이 무엇인가?  라고 묻는 즉시,  탄트라는 묻는 자에게 그가 지금 눈먼 상태에 있음을 일깨워 준다.

그런다음 그를 변형시켜 그로 하여금 빛이 무엇이라는 것을 체험하게 해준다.   탄트라는 결코 빛이

무엇이라는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지 않는다.  대신 빛으로 인도하고 빛을 보게끔 눈을 띄워 준다.

 

그래서 탄트라의 해답은 지적인 것이 아니다.  눈먼 사람에게 빛에 대해서 설명해 준다면 이것은

지적인 것이다.  하지만 눈먼 사람 자신이 직접 눈을 떠서 빛을 볼 수 있다면 이것은 본질적인 것이다.

탄트라를 지적이 아니라 본질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래서 시바는  데비의

물음에 답을 주지 않는다.

한편 탄트라는 우리의 일상적인 언어와는 전혀 다른 언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세계로 들어가기 전에 먼저 우리는 확실히 이해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탄트라의 언어는 시바와 그의 연인 데비 사이의 대화이다.  데비는 묻고 시바는 대답한다.

모든 탄트라가 이런 식으로 시작한다.  왜? 왜 그런 방식을 사용하는가?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은 선생과 학생의 대화가 아니다.  이것은 연인끼리의 달콤한 속삭임이다.  둘 사이에 

사랑이 없다면 깊은 가르침은 전달되어지지 않는다.   스승과 제자 사이는 연인만큼 깊은 

관계여야 한다.   오직 그때만이 신비하고 초월적인 것이 오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탄트라는 사랑의 언어이다.  제자는 사랑의 자세 속에 머물러야 한다.  탄트라는 제자가

수용성을 가지고 움직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제자는 여성의 수용성으로 표현된다.

오직 그때만이 문가가 가능하다.  그대가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여성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성적인 수용성의 기질을 갖추어야 한다.   데비는 묻는다.  그것은 여성적인 질문의

태도를 의미한다.  그러면 왜 여성적인 태도를 이렇게 강조하는가?

 

남자와 여자는 신체적으로 다를 뿐만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다르다.  여성적인 마음은 수용성을

의미한다.  전체적으로 받아들임, 완전한 신뢰와 헌신,  그리고 사랑을 의미한다.   그래서 제자는

이 여성의 심리 태도를 지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는 배울 수 없다.  그대가 닫혀 있는 한 

그대는 해답을 얻을 수가 없다.  질문만 던지고서 닫힌 채로 남아 있다.  그때 해답은 그대를

통과할 수 없다.  그대의 문은 닫혀 있다.  그대는 죽어 있다.

여성의 수용성은 자궁의 받아들임이다.  그것은 많은 의미를 갖고 있다.  거기에는 단순한 수용 이상의

그 무엇이 있다.  여성은 어떤 것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그것을 자기의 일부분으로 만들어 버린다.

남성의 정액을 받아들여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생명체는 자기 몸의 일부가 된다.

그것은 결코 외부의 이물질이 아니다.   그만큼 여성의 몸은 창조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또한 태아는 그 속에서 자라기 시작한다.  

 

제자에게는 자궁과 같은 수용성이 필요하다.  받아들이는 것은 죽은 지식을 긁어 모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대 안에서 자라나야 한다.   그것은 피와 살이 될 것이다.  그것의 성장은 그대에게 변화를

가져다 준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대를 변형시킬 것이다.  이것이 바로 탄트라의 방식이다.

모든 탄트라 경전의 형식이 데비의 질문에 시바가 대답하는 것으로 일관되는데 데비는 시바의 

여성 파트너이다.

한편 현대 심리학에서는, 특히 심층 심리학에서 말하기를 인간은 남성과 여성을 동시에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극단적인 남자거나 여자이기만 한 인간은 없다.  모든 사람이 양성을 갖고 있다.

남자이면서 동시에 여성을 갖고 있으며 여자이면서 동시에 남성을 갖고 있다. 

이것은 서양에서 매우 최근에 발견된 사실이지만 탄트라에서는 수천 년 동안 가장 기본적인

개념 중의 하나가 되어 왔다.   그대는 시바가 아르다나리쉬바르의 모습,

즉 반남 반녀의 모습을 한 그림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인류 역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유일한 것이다.  시바는 반은 남자,  반은 여자로 묘사되어 있다.

그래서 데비는 단순한 파트너가 아니다.  그녀는 시바의 다른 반쪽이다.  그리고 제자가 스승의

다른 반쪽이 되지 않는 한 스승으로부터 비법을, 심오한 가르침을 전수받기란 불가능하다.

그때가 스승과 하나가 될 때 비로소 의심이 사라진다.  그때 비로소 논쟁이 사라지고

논리와 이유가 사라진다.  완전히 하나로 흡수되어 새로운 것이 창조된다.  그대 속에서 

그 가르침은 자라기 시작하고 결국에는 그대를 변형시킨다.

논리라는 것에 대해 살펴보자.   첫째 논리적인 언어는 공격적이고 폭력적이다.

내가 논리적인 언어를 사용한다면 나는 그대의 마음에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대에게 확증을 주고 개종시켜서 나의 제자로 만드는 것과 같다.  그때 나의 주장은 옮고

그대의 주장은 틀리게 된다.  논리적인 언어는 자아 중심적이다.  그것은 나는 옳고 네가 틀렸다 라는

것을 반드시 증명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상대방의 에고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오직 자신이 에고에만 관심이 있다.   자신의 에고는 항상 옳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랑의 언어는 완전히 다르다.  나는 나의 에고에 더 이상 아무런 관심이 없다.

나는 그대에게만 관심이 있다.  나는 내 말을 증명하거나 나의 에고를 강화시키는 데 무관심하다.

나는 오직 그대를 돕는 데만 관심이 있다.  그대가 성숙하고 변형되고 다시 태어나는 것에만 

신경을 쓴다.    

두번째로  논리는  항상 지적이다.  그때 개념과 원리는 매우 중요한 것이 된다.  그리고 논쟁이 중요해진다.

그때 무슨 말을 하든 사랑의 언어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사랑의 언어는 그렇지 않다.

그때 말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말은 단지 가슴을 담는 그릇이다. 

가슴과 가슴의 전달이 중요한 것이다.  그것은 논쟁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를 이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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